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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오답노트

한국사 불합격을 통해 얻은 것

by 브릭

오래간만에 자격증 공부를 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줄여서 '한능검'이라고도 불리는 자격증이었다.


자격증 공부를 시작한 계기는, 지금의 직장을 다니면서 슬슬 이직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직을 생각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돈'이었다.

이전 직장처럼 실적 스트레스가 없어진 부분은 좋았지만, 덩달아서 돈도 줄었다.


취업 불황 시기에 정규직으로 채용된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미래를 생각했을 때 이곳에 안주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생각은 그렇게 해도 막상 직장을 다니면서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 준비할 생각을 하니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한 친구가 하나씩 준비해 보면 되지 않겠냐는 조언에, 가볍게 마음먹고 시작해보자 싶었다.



한국사 시험을 접수할 당시엔 가벼운 마음이었다.

3개월 밖에 남지 않은 올해를 보면서, 자격증 하나라도 따야겠다고 생각했고 마침 한국사 접수 기간이었다. 원서접수할 땐 한 달 하고 며칠 더 남았던지라 여유롭다고 생각했다.


3주 정도 남았을 때부터 조금씩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역사시간이 새록새록 떠오르기도 하고 최태성 선생님의 강의가 재미있었다.

오랜만에 하는 공부라서 나름대로 스케줄표를 만들어서 완강을 언제까지 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하루, 이틀 점점 계획이 밀리기 시작했다.

추석연휴가 중간에 있어서 진도를 빠르게 나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출근할 때보다 공부를 더 못했다. 연휴기간 동안 일정 또는 약속이 있는 날엔 앞뒤로 시간 내서 강의를 들어야지 계획해 놓고, 외출하고 집에 오면 진이 빠져서 쉬기 바빴다. '조금만 쉬자'는 다짐이 자기 직전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곤 했다.


결국 벼락치기를 해야 했다.

시험 8일 남기고 강의 6개, 다음날엔 8개를 몰아 들으면서 전체 강의 40강 완강을 드디어 해냈다.

기쁨도 잠시, 강의를 들었다고 해서 암기가 동시에 되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암기를 위한 복습을 시작하면서 문제를 푸는데 어라? 삼국시대부터 막혔다.


나름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공부를 허투루한 거였나. 시험은 다가오고 시간은 없고... 불안감과 피곤도만 높아져갔다.

졸리고 집중이 안 될 때는 암기법, 공부방법을 열심히 찾아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해보려고 했다. 기출문제를 풀다가 영 점수가 나오지 않아서 다시 개념으로 돌아가 내용을 검토하기도 하고 틀린 문제는 선지를 반복해서 보기도 했다.



시험 당일이 되었다.

한 중학교에서 시험을 봤는데, 오래간만에 와보는 학교에 기분이 새로웠다. 감독관은 시험 시 주의사항을 전달해 주셨고 시험지를 건네받고 기다렸다.

시험시간은 80분, 그 안에 50문항을 풀고 마킹도 해야 했다.


긴장감 속에 한 문제, 한 문제 풀어가는데 생각보다 헷갈리는 문제가 많았다.

시험 종료 15분 전부터는 답안지를 제출하고 퇴실이 가능했고 하나둘씩 퇴실하는 사람들 속에서

불안했지만,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고 문제를 풀고 마킹을 완료했다.


80분이어서 시간이 남을 줄 알았는데, 교실을 나왔을 땐 내가 마지막이었다. 시간을 거의 다 쓴 거였다.

그 순간엔 결과가 어찌하든 치열하게 풀고 나와서 미련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했다.


하지만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는 게 사람 마음이라고. 가답안으로 채점을 하면서 설마 싶었다. 그 설마가 일어나고 말았다.

한 문제 차이로 불합격을 하게 된 거였다.

고작 2점 차이였다.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채점을 해도 같은 점수였다.

이럴 수는 없었다.

두 문제도 아니고 달랑 한 문제로 떨어지다니.

다시 공부를 해야 한다니...

일주일 또는 3일 만에 벼락치기해서 고득점으로 합격했다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괴감에 빠졌다.


비교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막판에 몰아서 공부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직장 다니면서 열심히 했는데...

저 사람보단 내가 공부 시간이 많을 텐데...

분명 시험장을 나왔을 땐 미련 없이 후련한 마음이었는데, 시험지를 보고 있으니 미련이 철철 흘렀다.


급기야 '나는 해도 안 되는 인간인가 봐.' 하는 절망까지 들었다. 이게 뭐라고...

그저 많고 많은 시험 중에 한국사 시험일 뿐이고, 나는 거기서 한 문제 차이로 불합격했을 뿐인데.


내겐 트라우마라 할 수 있는 수능날이 10년이 더 지났는데도 그때의 감정을 불러왔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그에 따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던 그 날, 남은 건 절망 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도 실패할 때마다 '나는 해도 안 되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깊이 박여서 뽑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제 30대를 살고 있는데, 그때 그 감정을 벗어나지 못하고 과거에 머무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 안에 속삭이는 어둠의 소리를 떨쳐내야 했다.

내 안에 깊은 가시를 뽑아내야 했다.


기존 사고를 뒤집는 역발상을 시도했다. 이번 시험이 아깝게 떨어졌으니 시간 낭비만 한 것일까? 내게 남은 건 무엇일까? 반대편을 생각하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


1. 다시 도전할 다음 기회가 있다는 게 감사한 거 아닌가?

2. 오래간만에 무언가에 몰두해서 집중한 경험을 했으니 집중력 훈련을 한 시간이다.

3. 벼락치기 체질을 바꾸는 시작이다.

4. 다른 사람들의 공부법은 참고하되, 비교는 금물. 나만의 속도를 인정하자.

5. 한 번에 붙었다면, 이렇게 나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6. 느린 것 같아도 그 시간을 즐기면서 하자.


'나는 해도 안 되는 인간인가 봐.'에서 출발한 것이 기도하면서 반대쪽을 생각하려고 하자, 역발상이 일어났다. 중요한 건 맞고 틀리고 보다, 그것을 통해 얻어낸 오답노트였다.



"신라는 삼국 중 나라의 시작도 가장 늦었고 전성기도 가장 늦게 왔지만, 그 신라가 결국 삼국통일을 해내고 천년 제국을 세운 역사의 승리자이자 주인공이 됐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당장은 조금 늦거나 돌아간다고 느껴지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과 조건 속에서 어떻게 준비하고 결집하고 행동하냐에 따라 여러분이 최후에 웃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by 최태성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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