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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튜라 Oct 18. 2020

적당히 교사

사실은 어쩌다 보니 이러고 살고 있습니다.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으면 무의식이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데 우린 바로 이런 것을 두고 운명이라 부른다.
-칼 융-
  

  교사가 된 것은 내 운명이었다. 그게 나의 주체적인 의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융의 말처럼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다 보니, 어쩌다 보니 교사가 되어있었다. 무의식에 의해 좌우되는 삶이 늘 그러하듯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언제 여기까지 왔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어쩌다 교사가 되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부터 꿈이 선생님이진 않았다. 그것보다 훨씬 더 다채로운 꿈을 꿨다. 경찰특공대를 보고 경찰이 되고 싶기도 했고, ‘firefighter’라는 말이 멋있어 소방관이 되고 싶기도 했다. 그 외에도 다양한 꿈을 가졌고, 선생님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면서 고등학교에서 ‘윤리와 사상’이라는 과목을 배우면서 철학과 윤리의 매력에 빠져 윤리 교사가 되는 미래를 상상하기도 했다. 진지하게 진로를 결정한 것은 아니고 대략적인 미래를 그려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윤리교육과에 진학하게 되었고, 임용고시에 붙었고, 선생님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내가 상상했던 선생님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조금 동떨어져 있긴 하다. 현실에 치이며 살아가다 보면 꿈이 희미해지는 것처럼 내가 바랐던 모습이 점차 희미해져가고, 현실에 적당히 타협하며 지내고 있다. ‘균형잡기’라고 표현하는 게 좋겠다. 나는 이제 적절함, 적당함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희미한 이상과 꿈을 떠올리기도 하고, 뚜렷한 현실에 나를 끼워 맞추기도 하면서 삶의 적당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부족함이 느껴질 땐 현실을 핑계로 어쩔 수 없다고 위로를 하기도 하고, 더 나은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도 하기도 한다. 아직 이리저리 굴러가고 있다. 늘 타협과 비타협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교육자로서의 헌신이나 책임감 등의 거창한 사명감들을 미뤄두고 보면, 선생님으로 살아가는 게 전반적으로 즐겁다. 아직까지 많은 풍파와 시련을 겪어 보지 못한 초보 교사의 극도의 낙관주의일지도 모르지만, 대체적으로 선생님의 삶은 즐겁다. 쓴맛과 단맛의 비율이 3:7 정도 되는 것 같다. 기억력이 좋지 못해서인지 좋지 못한 일들은 금방 잊어버린다. 특별히 기억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그래서 뒤돌아보면 좋은 기억들이 많은 것 같다. 지나간 추억이라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 삶은 적당하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내 인생, 무의식에 의해 지배되어 가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 지나온 삶의 궤적을 돌아보면 ‘이 정도면 적당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은 잘난 사람들과 비교를 하며 나 자신에게 부족함을 책망하기도 한다. 행복이란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도 가끔 잊어버린다. 그렇지만 다시금 생각을 곱씹어 보면, 다른 사람의 인생과 비교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 인생에 적당히 만족한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대책 없는 낙관주의는 내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준 일등공신이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더라도 삶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었다.     


다른 사람의 기준을 채우기는 부족해도, 누군가에 비해 한참이나 모자랄 수는 있어도, 내 기준에는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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