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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e May 31. 2020

깍두기


 아침 8시 40분.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주문했던 무가 배달되었다. 부지런한 배달기사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상자를 들어 안으로 옮겼다. 배달 온 20키로 중 10키로는 집에서 쓸 요량을 하며, 배달박스 속의 무를 뒤적여 본다. 기대했던 것보다 아주 크고 좋다.                   

 방금 뽑아 다듬어져 배달된 듯 뽀얗고 싱싱한 모습이 예쁘다. 팔을 걷어 부치고 무 껍질부터 벗기기 시작했다. 슥슥 부드럽게 칼날이 내려갔다. 슬쩍 물로 헹궈 털어낸 뒤, 바로 뚜걱뚜걱 무를 자른다. 여리고도 단단한 무가 물기 많은 속을 들어냈다. 칼에 썰리는 느낌도 좋다. 썰리는 자리마다 단물의 향이 물씬 올라온다. 이번 무 정말 좋다. 좋은 재료는 괜스레 기분을 좋게 한다. 어설픈 요리사도 왠지 으쓱한 느낌이 들게 한다. 네모지게 썰은 무를 연두 형광색 함지박에 담아놓고 소금과 설탕을 꺼냈다.


『지난번에도 간 맞추는데 실패했지…  소금을 좀더 많이 넣어야 해. 됐다 싶을 때보다 더 많이…』


 한번 소금을 뿌려놓고 설탕을 뿌리고, 그리고 지난번 실패를 떠올리며 한번 더 소금을 넣기로 했다. 두번째는 넣으면서도 약간 주춤하는 마음이 든다. 짜지 않을까.. 가늠을 할 수가 없다.

 골고루 소금설탕을 섞어 버무리고 난 뒤엔 무보다 더 빨리 소금에 절여진 듯한 손을 털어낸다. 양 손바닥을 쫘악 당겨 펴주고 서둘러 수돗물을 틀어 손을 헹궜다. 한 달에 한 두번 겨우 물이 나오던 킬리마니지난 집에서는 물 한 방울 새는 것에도 절절 맸었는데 사람마음이 간사하다고 물이 거의 끊기지 않는 이곳으로 이사온 뒤엔 손 한번 헹구는 데에도 이렇게 물을 세게 틀고 씻는다. 개수대속으로 물결을 이루며 콸콸 흘러내려가는 물을 보면서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무가 절여지는 동안 양념을 만들어 놓는다. 생강이 들어간 개운한 김치를 좋아하는 터라 늘 냉동실엔 얼려놓은 생강이 들어있다. 한 개만 사기도 애매하기도 해서 많이 사서 껍질 벗겨 얼려놓긴 하는데, 영 생으로 넣는 것보다 맛과 향이 덜하다. 이것저것 재어놓고 잘 못 버리는 성격이 생강에서도 그렇다. 뭐든 필요할 때 바로 하는 것이 훨씬 좋은 질을 제공한다는 걸 알고도 뭔가 처덕처덕 쌓아놓는 습관을 버리질 못한다. 늘상 입으로는 미니멀리즘을 중얼거리면서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도 안 날 만큼 집안에는, 내 삶에는 무언가 정리되어지지 않은 것들이 여기저기 가득 처재여있다.

 또 어쩔 수 없이 얼려놓은 이미 있는 생강을 꺼냈다. 칼로 먼저 잘게 썬 다음, 마늘과 같이 절구 속에 넣고 찧는다. 고춧가루를 붓고 멸치액젓을 넣고, 새우젓도 한 숟가락 떠서 넣는다.   달큰하면서 비린 새우젓 냄새에 또 못 참고 새우 한 두마리를 집어 입 속에 툭 털어 넣었다. 밀가루풀은 그냥 생략하기로 했다. 나중에 무 절인 물이 꽤 많이 나올테니, 그걸 양념에 집어넣으면 적절한 농도가 될 터이다. 어쩔 수 없이 절여지는 무는 본래 가지고 있는 달큼한 물이 빠져나올 수 밖에 없는데, 그 맛이 또 아까워 그냥 깍두기를 할 때는 어떻게든 그 물을 이용해 양념을 만들기로 했다. 간을 맞추고 양념이 준비되고 무가 절여지기 기다리는 시간.. 잠깐의 짬이 찾아오는 시간이다.




『부침개 해서 먹자.. 점심때 넘어와』

L언니네 집으로 건너가면서, 슬쩍 와인 한 병을 핑계 삼아 싸 안고 갔다. 요즘 들어 날씨는 변덕스럽고 기분도 종잡을 수가 없다. 싫은걸 비비꼬아 돌려 말하고 스스로도 변명처럼 이유를 만들어 딴 소리를 하던 날, 사실은 상대방도 내 진심을 다 알아본 터라 더욱 칙칙한 기분이었다. 그냥 남편의 계획이 싫다, 전혀 동의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크게 터졌더라도 더 쉽지 않았을까? 더욱 한심한 건 무언가 착한 사람인척 하고 싶은 마음이 습관이 되어 시도 때도 없이 변명 같은 이유를 먼저 내뱉고, 진심을 전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왜 바로 깔끔하게 제대로 된 내 마음을 전달하지 못할까, 그게 뭐 대수라고.. 쉽게 오르내리는 머리가슴 속 열선이 정말이지 웬수같다. 그렇게 가라앉은 기분으로 마주한 부침개 상은.. 너무 바삭바삭하고 맛있어서 어이없게도 금방 흥이 돋기 시작했다. 마음속 열선이라니.. 구리선이야 분명히..


 딱 한잔씩만! 들고 간 와인을 꺼내 들고 잔을 나누었다. 낮이니까 한잔씩만 하자.. 성실한 우리 언니동생들과 함께 마시기 위해선 그 정도가 딱 좋아.. 점점 흥이 돋고 기분은 들떠 농담도 깊어진다. 얼굴이 당기도록 웃고 먹고 하다 보니 싸 들고 갔던 복잡한 생각들은 어디론가 덮여지고 보이지도 않는다.

 접시 한 가득 언니네 깍두기가 리필되어 다시 올라왔다. 잘 익은 아작아작하고도 짭짤한 무가 입안에 들자 달큼한 물도 함께 씹힌다. 드라이 와인과 짭짤한 깍두기 궁합의 새로운 발견이다!


『언니야 맛있다!! 정말 맛있다 이거. 』

『깍두기가 참 여러 의미 있다. 어데 누구하나 끼워주는 것도 깍두기라하고.. 조폭이나 힘 좀 쓰는 기도같은 사람도 깍두기라 하고… 그 사람들은 머리를 그렇게 깎아서 깍두기라고 하는 건가? 맞아맞아』

『아작아작』


 복잡할거 있나. 인생 맛있는 거나 같이 먹으면서 이것저것 떠들다 웃다 보내면 되지. 생각은 간단한데.. 이것도 진짜 적용은 쉽지 않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되는 건지.. 젠장 인생의 미니멀리즘 정말 멀고도 어렵다.



 두 시간쯤 지나 절여진 무를 하나 집어 씹어보았다. 꽤 짭짤한 것이 이 정도면 괜찮지 싶다. 물에 소금기를 씻어내고 한번 씻어 채반에 받쳐놓았다. 다시 한번 싱크대 개수구로 물이 콸콸 흘러내려간다. 참 한국음식은 물을 많이 쓴다니까…

 물기 빠진 무를 다시 함지박에 담고 만들어놓은 양념을 부었다. 고무장갑 사놓는걸 또 깜빡해서 일회용 비닐장갑을 꺼내 든다. 플라스틱 고리에 몸이 끼인 거북이라던가 수해로 무너진 산의 단면을 이루던 비닐산 등의 장면이 떠오르면서 비닐장갑을 쓰면 마음 한구석이 찝찝하지만, 어쩐지 김치양념은 맨손으로 문댈 자신이 없다. 찔리지나 말 것이지.. 나약한 우유부단함을 안고 무를 문질러댄다. 제법 양념물이 들어 깍두기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이쯤되면 기대감이 슬쩍 생겨난다. 깍두기 담을 통을 내어놓은 뒤 드디어 한입 집어 맛을 본다. 아작아작아작….


앗..

또 싱겁다.

인생은 그렇게 복잡하게 쌓아놓고 지내면서 왜 깍두기 소금은 매번 미니멀하게 들어가는 건지. 뭐 하나 참, 쉬운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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