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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랄라 Sep 04. 2022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하는 일


제가 얼마나 재수 없었는지 생각하면, 너무 부끄러워져요.


 인쇄소 미팅을 마치고 나오자,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전 회사에서 2년이 넘게 고객들에게 발송되는 DM (종이 우편물) 을 만들었고 각종 콘서트, 오페라 등등의 행사 브로셔를 많이도 만들어 내면서 한 번도 인쇄소에 가본적은 없었다. 인쇄소 뿐인가. 대부분의 거래처와의 약속이 생기면 늘 우리 회사로 와주셨다.


 인쇄소 사장님은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잘 쓰지 않는다는 의자의 먼지를 털어주셨다. 인쇄소 사무실 옆은 세무사 사무실이였는데 이런 빌딩에 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생경한 경험이였다. 용지 선택을 해야하는데 나의 바램처럼 '엽서를 두께감이 있고 종이 재질을 잘 살리는 종이에는 이런 몇가지 종이가 있습니다.' 라는 추천은 불가능 한 것이였다. 도착하자마자 수많은 종류의 종이에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내가 선택하고 내가 그 결과를 책임지는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회사에서 일을 할 때는 보통 그 중간 과정을 해주는 분들이 항상 계셨다. 보통 에이전트 (agent)라고 불리는 분들이 중간에서 모든 것을 조율해 1,2,3을 뽑아 주시면 그 중에서 선택만 하면 되었다.



 다행히 정은님과도 뜻이 맞아 제일 마음에 드는 종이를 선택하고 견적 협의를 하면서 '저희가 돈이 없어서요.'라는 말을 하는데 회사에서 일하면서 한 번도 이런 얘기를 해본적이 없었다는게 떠올랐다. 물론 견적을 조율하고 깎는 일은 했었지만 실제로 예산이 부족해 그 안에서 전전긍긍 했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교정을 보기위해 출력할 곳을 검색하고 별도의 돈을 지불하고 나오면서 '나 진짜 편하게 일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에 편히 앉아서 모든 것이 손 하나만 까딱하면 다 되는 곳에서 일했다. 인쇄용지가 제대로 채워져 있지 않을 때마다 그 작은 불편에 툴툴 거리면서.


      

 교정지를 뽑아들고 나오면서 혜영, 정은님과 카톡으로 계속 대기업에서 일했으면 정말 재수없는 사람이 됐을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지금도 내가 얼마나 재수없었는지 생각하면 정말 부끄러워진다. 대기업이란 타이틀만 달고 의기양양 했던 나날들, 돌이켜보니 한 번도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며 일한 적이 없었더라. 그래서 회사를 찾아오는 그분들의 발걸음에, 우리의 일을 위해 움직여주시는 손과 발에 감사한 줄도 모르고 일했다.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감리' 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 실제로 해본 적은 없는 일, 실제로 원하는 색으로 인쇄가 잘 나왔는지 감리를 보는 것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미팅 일정을 잡기로 했는데 쉽지가 않았다. 인쇄소 사장님이 계속 시간을 바꾸셨는데 그 속사정을 알 수가 없었다. 우리가 워낙 소량 인쇄를 해서 그런건가 미루어 짐작만 할 뿐이었는데 이렇게 발을 동동 거리면 A부터 Z까지 모든 일을 다 하는게 처음이였다. 그동안은 이 모든 과정의 끝에서 큰소리 치고 yes or no를 얘기했을 뿐이었는데 아무런 이유없이 바뀌는 시간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계속 기다리는 입장이 된 거다. 


 퇴사한다고 했을 때 한 선배가 '야생의 세계로 온것을 환영해' 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야생? 난 이미 힘들만큼 힘들어봤던 몸이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건 착각이였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우스갯 소리로 브런치를 시작하는 조건 중에 '대기업 퇴사'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왜 그런지 알겠다. '대기업'이란 타이틀을 떼어보니 달라진 세상에 대해 얼마나 할말들이 많겠는가!



나에게 영감이 되어주는 '레퍼런서의 말들'



 레퍼런서의 말들이 스티커로 탄생했을 때 (영광 스럽게도 내가 말한 문장도 포함되어) 내가 한 말이 물화된다는 굉장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문장이 내게 진짜 영감으로 다가온 것은 이번 엽서 제작을 하면서 문장이 탄생한 배경들을 알게되면서다. 스티커로 만났던 문장 그 자체도 좋았지만 왜, 어떻게 이 문장들을 말하게 되었는지 레퍼런서 각각의 서사를 들으니 문장을 볼 때마다 더욱더 와닿는다. 그래서 윤문하고 교정하는 작업을 하며 문장을 보고 또 보면서 '와, 좋다. 진짜 좋다.' 라는 말을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주변에서 속속 도착한 스티커에 대한 칭찬과 감사인사를 들을 때 마다 문장이 탄생한 배경의 감동을 꼭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감리까지 보면서 눈앞에서 인쇄된 엽서를 보면서, 물화되는 많은 말들 중에 우리가 만든 이 말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 닿기를 바랬다. 창고살롱의 레퍼런서들이 한 말들이 진심으로 나에게 힘이 되어주고 영감이 되어주고있다. 이 문장들이 이런 위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레퍼런서들이 본인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한 말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진심은 언제나 통하는 법. 레퍼런서들이 이 문장을 말하게 된 마음 그리고 우리가 이 문장을 물화하게 된 진심이 통하기를 그래서 또 다른 위력을 발휘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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