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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하 Sep 05. 2023

그 시절의 지옥이, 더 끔찍한 지옥을 만든 건 아닐까?

서이초 선생님의 49재에 떠오른 생각

서이초 선생님의 49재 집회와 또 다른 선생님들의 비보를 접하고 눈물이 났다. 세상이 무관심하던 사이에 얼마나 많은 선생님들이 끔찍한 지옥을 살고 있었던 걸까? 가혹한 체벌과 차별과 촌지로 얼룩진 학창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당혹스럽다. 이 사회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며 이 지옥은 그 지옥과 무엇이 다른 걸까?


내가 졸업했던 초등학교 역시 지옥이었다. 높은 지대에 있던 학교라 그런지 학생들은 유난히 빈부차가 컸고 다수의 교사들은 노골적으로 촌지를 요구하고 챙겼다. 갑작스레 전학을 하고 5학년이 되어 만난 최모 교사(아직도 이름을 정확히 기억한다.)는 그런 쪽에서 탁월한 사람이었다. 몇몇 아이들을 찍어 칭찬을 하고 우쭈쭈 기를 살려준 다음 “어머니 오시라 해”라고 말을 꺼내면 눈치가 빤해진 아이들은 모두가 이해했다. 다음날이 되면 그 아이의 엄마가 촌지 봉투를 들고 나타날 것이며, 그 아이는 일 년 동안 반장, 부반장, 무슨 무슨 부장들이 되고 특별한 호의를 받는다는 것을.


내게도 그 말이 떨어졌을 때가 선명하게 기억난다. 빳빳한 와이셔츠 깃 위로 주름을 만들던 살찐 목 위에 얹힌 기름진 얼굴과 탐욕스러운 미소가. “저, 엄마는 못 오시는데요”라는 내 말에 급 싸늘해졌던 화난 표정과, 손을 올려 내 뺨을 때렸을 때의 얼얼했던 느낌도. 생전 처음으로, 아니 유일하게 빰을 맞은 순간이었다. 당시 내 엄마가 돌아가신 이듬해였으니, 아이는 그저 사실을 말한 것뿐이었는데 말이다. (지금도 잘 이해가 되진 않는다. 왜 못 오시냐, 물어볼 법도 한데, 무작정 그렇게 화를 냈던 건 자격지심이었을까? 설마 양심이 있어서?)


이후로 일 년은 정말 길었다. 그에게 간택된 아이들이 그의 칭찬과 차별적이고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활개를 치는 학교에서 나는 점점 자발적 고독을 즐기는 내성적인 아이로 학교생활을 보냈다. 엄마의 부재로 인해 달라진 환경도 상당히 열악하던 때라 나로선 꽤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어쩌면 내 안에 깃들어 있는 세상에 대한 냉소나 인간 삶에 대한 회의는 그때에 발아된 것일 지도 모르겠다.


학년 말이 되어 받은 성적표에는 “진취적이지만 이기적이다”라는 최교사의 의견이 적혀 있었다. 체육 빼고는 모두가 ‘수’를 받은 성적표였지만 미련 없이 북북 찢어 화장실에 버렸다. 집에서도 아무도 성적표에 대해 묻지 않아 다행이었다.


6학년이 되자 담임도 바뀌고 세상은 조금 달라지는 것 같았다. 임원 선거가 처음으로 직선제로 실시되었고, 고아원에서 다니던, 우리보다 두 살인가 나이가 많아 의젓하고 똑똑했던 친구가 생애 처음으로 반장이 되었다.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그 의젓하던 친구가 “제가 자격이 있는지…” 하며 눈물을 흘렸다. 고작 초등학교 6학년, 13살 때의 일이다.


그 지옥을 만들었던 선생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지만, 세월이 흘러 까마득히 잊고 살다 오늘 문득 생각이 났다. 정확히는 그 선생이 아니라, 엄마의 촌지로 인해 존재감이 급상승되었던 그 학급의 소수 아이들이. 악성 민원으로 이 시대의 선생님들을 끔찍한 고통으로 몰아넣은, 왕의 DNA 운운하는 괴물 같은 부모들은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일까 생각하다 문득 떠오른 것이다.


그 시절 그 작은 세계에서 그런 식으로 세상과 권력을 배운 아이들이 성장하여 현실의 그런 부모들이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러니까, 그 시절의 지옥이 지금의 더 끔찍한 지옥을 만든 건 아닐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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