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특별한 선생님으로 만들어주는 특별한 아이들
작년 3월, 두 번째 3학년 담임을 맡아 개학할 때는 이 3학년 아이들이 졸업하는 날이 오기나 할까 막막했다. 그런데 그 졸업식이 드디어 왔다. 이번 3학년 학생들은 일 년 내내 나에게 특별했다. 재작년 3학년 아이들이 코로나에 입학해 코로나에 졸업하면서 이제껏 본 적 없는 무미건조한 아이들이었다면, 작년 3학년 아이들은 오랜만에 만나는 생동감 있는 아이들이었다.
내 문학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수능 한 달 전까지 <수능완성> 교재를 끝내달라며 수업을 마지막 마치는 순간까지 눈을 반짝이며 들어주었다. 수능 한 달 앞두고 더 급한 공부도 많고 더 잘 가르치는 인강 강사들도 많은데 학교 국어 선생님의 수업에 끝까지 집중해 준 것. 그것이 아이들의 얼마나 큰 신뢰와 애정인지 잘 알고 있다.
담임반 아이들도 참 고마웠다. 예의와 태도를 강조하는 담임이 답답하고 짜증 날 때가 많을 텐데도 속으로 생각할지언정 겉으로는 잘 따라주었다. 내가 하나를 주면 그 하나를 고맙게 여기고 표현하는 아이들이라, 나도 모르게 자꾸만 하나씩 더 주게 되었다. 따로 신경 쓰지 않아도 각자 맡은 학급의 일인일역을 수능이 끝날 때까지도 성실하게 해내온 아이들. 학교에서 간식이 나오면 '담임선생님 것'이라고 메모를 붙여 교탁에 제일 먼저 남겨두던 아이들. 대강당 특강 시간에 다른 반 아이들은 인강 듣고, 유튜브 보고, 문제집 풀 때 담임선생님이 '강단에서 강의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켜라. 언젠가 너희도 저 자리에서 청중에게 말하는 사람으로 서게 될 테니'라는 말에 납득되지 않아도 따라주던 아이들. 수시에 불합격해도 속상해할 나를 위해 '선생님, 저는 대학에 떨어져도 선생님의 가르침과 진심은 오랫동안 제 삶에 기억될 거예요'라는 편지를 책상에 올려두고 가던 아이들. 수능을 치르고 수능 성적표가 나오기까지 애가 타는 한 달을 보내며 같이 모여 네 잎 클로버를 뜨개질해서 내 가방에 주렁주렁 걸어주던 아이들.
그 아이들이 졸업을 한다. 처음으로 파티 용품을 주문해서 교실을 꾸며보았다. 아이들이 졸업식에서 사진 찍을 때 조금이라도 기분 좋은 추억으로 남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해줄 말을 짧게 준비했다.
'일 년간 너희 덕분에 행복하고 고마웠어.
선생님의 부족함으로 상처 주었다면 미안해.
너희를 통해 더 좋은 교사가 되도록 노력할게.
그리고 너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것 기억하기를. '
끝으로 매번 시험 기간마다 아이들을 위해 해줬던 기도를 기억하며 마지막 기도를 해줬다. 아이들이 살아가며 힘들 때 언제든지 기도하면 붙들어주시기를. 나에게 이 아이들이 행복이었듯, 살아가며 만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이 되는 사람들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나만 이 졸업식에 하나라도 더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행사부장이었던 아이가 졸업 영상을 만들어왔다. 일 년 동안 반 아이들의 모습들을 틈틈이 영상과 사진으로 기록했다고 했다. 모든 친구들이 언제든 추억할 수 있도록 영상을 담은 QR코드 스티커를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영상 속에 힘든 고3 수험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활짝 웃고 있는 아이들의 순간들을 보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눈물을 보이지 않고 이 아이들을 보낼 자신이 없었다.
요리가 취미인 아이가 친구들에게 나눠준다며 빵을 구워왔다. 그리고 미대에 합격한 아이가 자신이 그린 그림 한 폭을 선물해 주었다. 그리고 편지에 이렇게 쓰여있었다.
'선생님, 고3 때 갑자기 미술을 전공하고 싶은데 너무 늦은 것 아닐까 상담하던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죠.
재능과 열정이 이렇게 뛰어난데 늦은 게 어딨 냐고.
언젠가 훌륭한 미술 작가가 되어서 학교에 꼭 그림을 기증해 달라고.
지금은 선생님께 제가 그린 작은 그림 선물하지만
언젠가 학교에 제 작품을 기증하는 훌륭한 작가가 될게요.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3년 동안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지 못해 마음 고생했던 학생은 편지에 이런 말을 했다
남들은 여고에서 행복한 추억을 만든다는데 3년간 친구 한 명 사귀지 못하고 졸업하며 제 고등학교 시절은 망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선물해 주신 시집을 열 번 넘게 읽으며 느꼈어요.
선생님을 담임선생님으로 만났으니 내 고등학교 시절도 나쁘지 않구나.
선생님 생각해서라도 이십 대 잘 살아볼게요. 감사합니다.
내 수업을 들은 학생의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고등학교 와서 들은 수업 중 선생님 수업이 제일 좋았어요.
그리고 이십 대에 제 꿈이 있다면 그건 선생님 같은 어른이 되는 거예요.
선생님께서 수업 시간마다 읽어주신 시와 책의 문장들 덕분에 고3 버텼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 외에도 내가 한 노력과 내가 준 애정 이상으로 나에게 고마움을 표현한 학생들이 많았다. 일 년 내내 내게 한 번도 별다른 표현하지 않던 아이들도 내게 다가와 꼬옥 안고 갔다. 꼭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과 함께. 내가 본인을 좋아하고 아꼈다는 것을 표현하지 않아도 아이들도 다 알고 있었구나 싶었다.
이렇게 고3담임 2년을 마무리 짓는다. 나는 매년 똑같은 사람이고 똑같은 교사인데 이 특별한 아이들이 나를 특별한 사람이자 특별한 선생님으로 만들어주었다. 어디 가서 내가 이런 사랑과 보람을 느낄까. 과분하고 과분하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직업 중 하나를 누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열아홉에도 이렇게 곧고 예쁘고 재능이 넘치던 내 학생들이 이십 대에 자신의 가능성들을 마구 키워나가기를. 그리하여 내 평생 청출어람의 기쁨을 누리기를. 내 학생들에게 언제 만나도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고 있는 선생님이기를. 고생이 달게 느껴지는 2023년 교직생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