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언어 실력이 되어야 통역사를 할 수 있는지 궁금해한다. 나 역시도 통역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주변에 통역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을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로 외국어를 잘해야 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우선 모국어와 외국어를 들었을 때, 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숨어있는 의미까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하며 이해한 내용을 외국어로, 혹은 모국어로 자유자재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외국어의 실력이 모국어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어야 좋은 통역이 나올 수 있다.
최근 어떤 웹사이트 번역을 하다가 coming soon이라는 팝업 창을 번역하게 됐는데, 이를 대체할 한국어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몇 분을 고민하고 나서야 이에 상응하는 “준비 중입니다”라는 국문 표현이 생각났다. 그렇게 어려운 수준의 번역이 아니지만, 대부분의 번역과 통역은 직역보다 해당 국가에서 널리 쓰이는 표현 해야 이를 접하는 독자나 화자가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A언어와 B언어의 실력이 완전하게 같기가 힘들고, 두 언어 혹은 세 개 이상 언어에 노출되는 정도와 시간이 비슷하기도 어려우므로 통역사 역시도 매번 어떤 표현이 더욱 적절한지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
나는 소위 말하는 ‘국내파’로 미국에서 보낸 시간이 총 1년이 되지 않아 인생의 96%를 한국에서 보냈다. 어릴 적부터 영어를 좋아했던 만큼, 미취학 시절엔 Sesame Street를 보고, 청소년 시기엔 팝송에 빠져 MTV를 하루 종일 보고, 좋아하는 가수에 대한 뉴스 기사가 실시간으로 국내 매체에는 올라오지 않아, 영문 기사를 직접 검색하고 가십 기사들까지 섭렵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모든 과정이 영어 실력을 향상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당시엔 전혀 공부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입시 공부를 하고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영어에 대한 노출 시간이 급격하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토익과 토플은 이미 좋은 성적을 갖추고 있었기에 취업에 영어 성적이 전혀 무리될 정도는 아니었고, 외국인과의 대화도 자유자재로 가능한 정도여서 본인의 영어 실력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부족했다.
정말 유창할 정도로 원하는 바를 남에게 영어로 전달하기에는 어느 순간부터 어려움이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주변에서 영어를 잘한다는 칭찬을 많이 했고, 스스로 영어 실력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자신하고 살았다. 그래서 겁도 없이 통번역대학원을 진학하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통번역대학원을 준비하면서 였다. 그동안 살면서 영어로 의사표현을 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지만, 내 생각이 아닌 다른 사람의 발화 내용을 이해하고 이를 영어로 전달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우선, 타인의 발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생각보다 높은 집중력과 기억력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해한 내용을 한국어나 영어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고민을 하면서 어렵게 통역하거나, 더 좋은 표현을 생각하다가 중요한 내용을 잊고, 호응 관계가 맞지 않는 엉터리 문장을 내뱉기도 했다. 물론 통역을 처음 배우며 겪는 필연적인 과정이었겠지만, 내가 쓰는 영어 표현이 틀에 갇혀 있고, 그렇기 때문에 더 다양한 표현을 구사하는데 어려움이 있음을 깨닫게 됐다.
통번역대학원 진학은 1년 정도 공부를 했다. 처음에는 그동안 감을 잃고 있었던 영어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부하는데 매진했던 것 같다. 다양한 팟캐스트 방송을 들었는데, 뉴스 같은 딱딱한 방송보다는 인터뷰와 같이 조금 부드러운 방송이 정말 ‘미국인들이 쓰는’ 표현을 익히는데 도움이 되었다. 영어 방송을 들으며 이를 꼭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아, 산책하거나 이동 중에 방송을 들으며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표현, 생소한 표현이 들리면 이를 스마트폰 노트에 적어놓았다. 지금은 아예 노트에 폴더를 따로 만들어 영어 표현을 정리하고 있다. 그래서 일정량 이상 쌓이면, 날을 잡고 엑셀에 정리한다.
통역사로 살고 있는 지금도 끊임없이 배우는 중이다. 매번 통역을 한 이후, 더 좋았던 표현이 뒤늦게 생각나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지금도 넷플릭스를 보다 보면,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나 표현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데, 그럴 때마다 아직도 내가 정말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한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미처 모르는 표현이 나온 적은 없기 때문이다. 평생 한국에서 자란 내가 100% 원어민과 같은 수준의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그나마 80% 이상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정도 외국어를 구사해야 통번역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기도 한다. 본인의 언어 구사 능력을 냉정하게 점검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B언어 실력이 어느 정도 기본이 되어 있어야 입시 준비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 A언어, B언어 간 구사 능력이 어느 정도 자유로워야 입시 시험 수준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 하지만, 언어 간 구사능력이 자유롭다고 하는 것은 B언어의 듣기, 쓰기, 말하기, 문법 중 어느 한 부문이 지나치게 낮지 않고 모두 다 어느 정도 높은 수준이라는 점을 전제로 한다. 만약, 그런 수준이 되지 않으면 모자란 부분을 채우는데 들어가는 시간이 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
통번역대학원 입시 준비 기간은 그래서 사람마다 다르다. 별다른 입시 공부를 하지 않고도 바로 합격한 사람도 있고, 1년 혹은 3년 이상을 공부해서 합격한 사람도 있으므로 정확하게 평균을 내기가 어렵다.
통역사가 되었다고 언어에 통달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일을 하면 할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아직 본인이 얼마나 부족하고 더 공부해야 하는지 아득해진다. 또한, 한국에서 생활한다면, 주 사용 언어가 한국어인 만큼 B언어에 대한 노출을 의도적으로 늘리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외신 매체에서 뉴스레터를 신청해 아침마다 보거나, 쉴 때는 인터뷰 방송들을 보는 것 정도는 큰 스트레스 없이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좋아하는 분야에 대한 유튜브 영상, 기사를 외국어로 찾아보는 것 역시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
외국어 실력을 늘리고자 하는 독자들은 한국어 사용 대비 외국어 사용 비율이 하루 중 얼마나 차지하는지 생각해보고, 조금이라도 외국어에 대한 노출 시간을 늘리는 것에 초점을 두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