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 삽질여행>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기차
여행지에서는 항상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세워뒀다 하더라도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그 이름은 여행길이다.
괴테가 사랑한 도시, 독일 하이델베르크로의 여행을 오래도록 꿈꿔왔다. 철학에 관심은 없었으나 괴테가 산책했다는 ‘철학자의 길’에는 관심이 있었다. 철학자의 길에서 내려다보인다던 고성과 강줄기를 바라보며 사색에 빠져보고 싶었다. 게다가 이곳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있는 도시다. 대학의 역사는 무려 14세기부터 이어진다. 그래서인지 하이델베르크만 찾으면 손쉽게 지성인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 홀로 배낭여행 중에 기차로 떠나는 야심 찬 당일치기 여행을 계획했다. 숙소는 프랑크푸르트에 있었고, 하이델베르크까지는 고작 기차로 1시간 정도만 투자하면 쉽게 갈 수 있었다. 당일치기 일정 중에서도 매우 만만한 일정이었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아무런 위험요소가 없어 보이는 이 길이 내 유럽 여행에서 가장 수난기가 될 줄이야.
고대하던 하이델베르크 여행을 앞두고 평소 게으른 여행자인 나조차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전날 예매해둔 기차표 시각보다도 꽤 이른 아침. 여유 시간을 가지고 프랑크푸르트역에 도착했다. 역 내에서 샌드위치를 사고는 곧장 기차표에 적힌 플랫폼으로 향했다.
‘여기서 아침식사나 하면서 기다려야지.’
콧노래가 나올 것 같은 여유로움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역은 유럽 전역에서 도착하고 출발하는 기차들로 활기를 더하고 있었다. 열차를 기다리며 샌드위치를 먹는 동안 내 앞에서도 서넛 대의 기차가 도착하고 또다시 출발했다. 시계를 한번 확인했다.
‘출발할 시간이 되어 가는데, 왜 전광판에 안내조차 없을까?’
그때 독일인 친구가 해준 조언 하나가 생각났다.
“독일 기차 믿지 마. 매번 지연되는 게 독일 기차라고.”
음, 그렇구나. 짜식들~ 의외네? 약속 잘 지킬 것 같고 대중교통도 발달했을 것 같은 이미진데? 천진난만하게 ‘후후’ 웃고 말았다. 그런데 출발 시간에서 10분이 지나고도 전광판에 안내 하나 없는 건 너무 하잖아. 슬슬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역무원을 붙잡고 어영부영 질문을 시작했다.
“저기요. 하이델베르크 행 열차는 도대체 언제 오나요?”
약속 잘 지킬 것 같고 교통 시스템도 좋을 것 같던 이미지는 다 부서졌지만, 무뚝뚝할 것 같다는 역무원 이미지만큼은 편견 그대로였다. 그는 귀찮다는 듯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아까 출발했는데요?”
“네? 그럴 리가 없어요. 제가 40분 전부터 저기서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플랫폼 바뀌어서 옆 노선에서 출발했어요.”
“헐….”
플랫폼이 바뀔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샌드위치 먹는 데만 정신이 팔려 안내방송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은 탓일까.
“티켓은 이미 샀는데, 그럼 저는 어떻게 하이델베르크로 가야 해요?”
나는 간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티켓 값 날려먹었다는 말만 돌아오지 않길 빌면서.
“30분 뒤에 오는 거 타세요. 하이델베르크가 종착역이에요.”
“헉. 정말 감사합니다!”
퉁명스러웠지만 매우 도움이 되는 대답에 만족하며 다시 플랫폼으로 돌아왔다. 그래, 사람이 이 정도 실수는 할 수 있는 거지! 시간을 좀 버리긴 했지만, 이 정도면 괜찮아.
잠시 후, 역무원이 타라고 한 열차가 도착했고, 나는 종착지가 하이델베르크라는 것을 확인하고 냉큼 올라탔다. 곧이어 기차가 출발했다. 그리고 기차는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서기도 어찌나 자주 서는지 아무래도 내가 KTX 요금을 내고 무궁화호, 아니 체감상 비둘기호에 탑승해 버린 것 같았다. 이 속도로 가는데 1시간 만에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휴대폰을 켜 GPS를 찍어 보았다. 출발한 지 30분이 지났는데, 하이델베르크까지 가려면 아직 한참이나 멀었다. 승무원 씨…. 제가 아무리 귀찮아도 그렇지…. 너무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걸 타고 가라고 조언할 수가 있어? 도착 시간이 전혀 예상되지 않았지만, 일단 탔으니 버텨보기로 했다. ‘하이델베르크 행 기차’니까 언젠간 하이델베르크엔 도착하겠지, 뭐.
기차는 느릿느릿 움직였고, 많은 사람이 타고 내리길 반복하다 어느 구간부터는 내가 탄 기차 칸에 그 어떤 손님도 남지 않았다. 오직 나만이 남겨졌다. 게다가 이번엔 한 역에 정차해서 기다리는 시간이 어찌나 긴지 10분이 넘게 도통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러움과 지겨움이 한꺼번에 쏟아져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아아, 기차가 출발을 안 해.”
“안내 방송 없었어?”
“독일어로만 뭐라 뭐라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언제 출발하냐고 물어봐.”
“내가 탄 칸에 사람이 아무도 없어. 잠시 내린 사이에 문 닫히고 기차가 다시 출발해버리면 어떡해?”
이런 이야기를 실컷 나누다 다시 시간을 확인해보니 이미 기차가 정차한 지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좀 이상하지 않아? 역시 내려서 물어봐야겠어.”
전화를 끊고 기차에서 내렸다. 역무원과 기관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기차의 머리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기차의 꼬리에서 머리까지 빠른 걸음으로 질주했다.
“이 기차는 언제 다시 출발하나요?”
나의 질문에 그들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답했다.
“이 열차는 지금 선로 과열 때문에 여기까지만 운행해요.”
“네에?”
어이가 가출할 것 같았다. 때는 7월이었지만 선로 과열을 걱정할 정도의 더위는 절대 아니었는데, 뭐요, 다른 것도 아니고 선로 과열 때문이라고요? 여기 기술 선진국 맞아?
“저는 그럼 하이델베르크까지 어떻게 가나요?”
“역 밖으로 나가면 무료로 버스를 탈 수 있어요.”
“네…. 알겠어요….”
이제는 나더러 또 버스를 타란다. 일단 가라는 데로 갔는데 대체 어디서 뭐를 타야 하는지 몰라서 헤매다가 딱 한 대 있는 버스를 발견했다.
“기차가 멈췄는데 여기서 버스를 타라고 하네요. 저는 하이델베르크까지 가야 해요.”
갑자기 낯선 외국인의 등장에 버스 기사가 당황했다. 몇몇 승객과 버스 기사는 독일어로 웅성웅성 토론하기 시작했다. 독일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해 어떠한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는 것 같았다. 멀뚱멀뚱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영어를 할 줄 아는 한 여성이 대신 설명해주었다.
“오케이. 당신한테는 지금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요. 이 버스는 언제 출발할지 모르는데, 버스를 기다려서 하이델베르크까지 가는 방법이 있고요. 아니면 경찰차를 타는 방법도 있어요.”
경찰차는 대체 또 무슨 소리람. 내가 여기서 경찰차까지 타야겠어요…? 내 얼굴은 당혹감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이 버스, 출발하려면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하는데요?”
그는 다시 버스 기사와 한참을 독일어로 토론하더니 다시 영어로 입을 열었다.
“그냥 저만 따라오세요. 저도 어차피 하이델베르크로 가야 하거든요.”
“헉,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목적지가 같은 현지인이라니!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니! 온갖 고비에도 한 줄기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무려 자전거를 끌고 탄 임산부였다. 기꺼이 나는 그를 믿기로 했다. 달리 의지할 데도 없었으니 그는 오롯이 나의 구원자였다. 언제 출발할지 모른다던 버스는 생각보다 일찍 출발했고, 작은 기차역 하나를 거쳐 이름 모를 또 다른 기차역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지금 내릴게요. 따라오세요.”
“네. 알겠어요.”
나는 그가 하자는 대로 쫄랑쫄랑 따라갔다. 기차역에서 또 다른 기차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혼자였다면 ‘아, 또 시련에 부딪히는가’ 싶었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10분 후에 오는 기차를 탈 거고요. 타고 10분 정도만 더 가면 하이델베르크역에 도착해요.”
“네네! 알겠어요! 고마워요!”
현지인 찬스라니 이렇게 듬직할 데가 있나! 그렇게 마지막 기차에 무사히 탑승할 수 있었고, 약 10분 후 드디어 나는 고대하던 하이델베르크역에 도착했다. 기존의 도착 예정 시간보다 무려 3시간이 흐른 후였다.
하이델베르크에 살고 있다는 그는 버스티켓 구매와 버스 타는 방법까지 알려준 후 내 곁을 떠났다. 여행길에서 만난 천사였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이 방황이 어디까지 비틀어졌을지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흑흑. 건강하게 잘 지내시죠? 아기는 무사히 잘 태어났나요? 지금쯤이면 아기도 많이 컸겠군요.
내가 하이델베르크로 여행을 다녀온 일주일 후, 이제 막 유럽 여행을 시작한 다른 친구가 프랑크푸르트에서 하이델베르크 당일치기에 도전했다는 말을 전했다. 그 친구는 버스를 예약해 아주 빠르고 편하게 다녀왔다고 한다. 젠장. 나도 버스나 예약할 걸! 여유만만하게 플랫폼에서 샌드위치나 먹던, 이 작은 실수가 이렇게 기나긴 괴로움을 낳다니! 다음부터 독일 기차는 절대 믿지 않을 테다.
* 이 글은 <웰컴 투 삽질여행>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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