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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린뒤맑음 Feb 19. 2021

취뽀 기념 무계획 머리비우기 겨울 바다여행

때로는 계획이 없어도 괜찮아

취뽀를 하긴 했다. 생각지 못했던 업계와 회사지만 뭐 원래 내 인생은 예상대로 흘러간 적이 거의 없다. 여튼 다음주부터 출근을 하게 되었으니 이제 평일의 자유를 박탈당할 날도 얼마 안남았다. 이럴 때 해야 할 건 뭐다? 여행!! 출근을 앞두고 어지러운 마음도 정리하고 얼마 안 남은 평일의 자유시간도 실컷 즐길 겸 내가 좋아하는 동해 바다를 보러 강원도 속초에 2월 17일 수요일 당일치기로 나홀로 여행을 다녀왔다.




당일여행이라고 방심해서 여행 짐을 미리 안 챙겨둔 탓에 집에서 늦게 출발하여 하마터면 버스를 놓칠 뻔 했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는 습성은 2021년에도 변하지를 않는다.


마음이 어지러울 땐 해변가에서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멍 때리는게 최고다. 요즘 출근을 앞두고 마냥 신나지만은 않은, 사실 좀 착잡한 상황인데 이럴 땐 역시 바다를 가야 한다. 바다 중에서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추억이 가장 많이 녹아 있는 동해로. 가장 익숙한 강릉을 갈까 하다가 생각해보니 속초에 가본 적이 없어서 속초를 여행지로 골랐다. 생각지도 못했던 건설업계로 가게 된 내 인생. 여행도 낯선 곳으로 가보자. 이번 여행의 컨셉은 무계획 머리 비우기 여행. 여행 짐도 출발 당일 아침에 허겁지겁 챙겼고 도착지가 속초인 것 외에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무작정 출발했다. 그렇게 동서울터미널에서 아침 8시 버스를 타고 숙면하며 달린 끝에 속초에 10시 20분쯤 도착했다. 뭐 계획이 없으면 어떻고 일행이 없으면 어떤가. 여행은 언제나 설렌다. 그것도 1년 반만에 보는 바다라니!! 너무 씐나!!!


조금 추웠지만 바다도 언제나처럼 푸르고 하늘도 새파래서 너무 기분이 좋았다.
속초시외버스터미널에서 걸어서 10분~15분이면 나타나는 영금정.


여행 코스 생각 없이 출발한 주제에, 속초 가는 버스에서도 푹 잔 탓에 속초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서야 터미널 대합실에 앉아 이제 뭐하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배는 고픈데 일단 네이버에 속초 여행을 검색하니 이 터미널 근처에 무슨 명소가 있다고 하네? 네이버 지도를 켜고 무작정 출발했다. 명소의 이름은 영금정. 추웠지만 예뻤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자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서울에서 2시간만 달리면 이런 속시원한 광활한 풍경이 있는데 당장 다음주부터 서울의 사무실에서 내 자리 내 컴퓨터 앞에 앉아 아둥바둥 살아갈 내 자신이 문득 슬퍼졌다. 아니야 오늘은 일 생각 하지 않기로 했잖아. 도리도리. 홍콩에서도 마음이 조금이라도 울적해질라치면 부리나케 달려갔던 내 최애 바다, 빅토리아 하버와 스탠리 베이가 생각났다. 


영금정에서 바다 풍경과 파도 소리에 취해 있는 동안 시간도 점심시간이 되어 배가 더 고파졌다. 네이버에 속초 맛집으로 검색하니 순대국에 오징어순대에 이것저것 조합된 1인 세트라는 걸 파는 유명한 맛집이 속초해수욕장 쪽에 있다고. 영금정에서 걸어갈 거리는 아닌 것 같아 거친 매너의 기사님이 운전하시는 향토적인 속초 버스를 타고 식당으로 향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식당에 도착했는데 식당 문은 형광색 체인으로 굳겨 잠겨있었다. 식당이 하필 오늘 휴무라고요? 연휴도 지났는데 수요일 점심시간 영업을 안하신다고요? 나의 무계획 여행을 더 빛내주는 멋진 식당이었다. 그냥 그 옆 식당에 갔다. 또 네이버를 열어 대체 맛집을 찾고 이동하기엔 배고팠다.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먹은 홍게살비빔밥.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식당에서 나오자 눈앞에 나타났던 속초해수욕장. 


점심 먹고 회사 들어가기 전에 이런 바다보며 산책할 수 있으면 좀 더 일할 맛이 날까?


걷다 보니 이런 조형물도 나타났고


모래사장 발자국도 구경하고


흔들의자에 앉아 오래도록 바다를 보고 듣고 느끼며 추억에 잠겼다.


언젠가 꼭 보겠다고 생각했던 픽사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을 최근에서야 봤는데 영화 속 주인공 라일리의 감정 기억 구슬이 있듯이, 이 날 흔들의자에서 동해에 관련한 추억에 잠기며 내 장기 기억 저장소에 저장된 동해 관련 기쁨 기억 구슬을 하나씩 꺼내보는 기분이었다. 8살 여름에 강릉으로 갔던 가족여행(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 최초의 바다), 13살 여름에 갔던 울릉도 가족 여행, 대학교 와서 동아리 친구들이랑 3번이나 갔던 여름의 하조대, 고등학교 졸업하고 모이기 어려웠던 고등학교 친구들이랑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부랴부랴 갔던 안목 해변, 취업하고 가족들이랑 다시 놀러 왔던 안목 해변, 전 회사 퇴사 직전 고등학교 친구랑 밤기차 타고 일출 보러 왔던 정동진. 추억 속 내가 동해를 배경으로 뛰놀고 까르르 웃고 행복해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내가 평생 가져갈 소중한 추억들의 배경이 되어줘서, 그리고 살다가 문득 힘들 때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항상 그 자리에 있어줘서 고마운 동해. 


이렇게 바다를 보며 추억에 잠겨있는데 글쓰기 카톡방의 방장님께서 깜짝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그리고 이날따라 난 또 카톡을 진동으로 해놔서 알림이 오자마자 바로 카톡을 보는 바람에 선착순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어머나 세상에 감사합니다! 무계획 여행에 나타난 무계획 바나나 우유. 


방장님께서 하사해주신 귀여운 바나나우유. 촤암나 아니 무슨 바나나우유가 1400원이나 한담? 옛 추억에 잠겨 있다가 요즘 물가에 놀랐다.


상추 상처 사채 시차 서초 시츄 세차 숙청 선창 셔츠 새참


속초해수욕장의 수호랑과 반다비도 마스크를 했다. 코로나로 올림픽 세계에도 난리가 났다.


속초해수욕장 옆의 보사노바 커피로스터스 속초점. 안목해변에 있던 보사노바를 고등학교 친구들이랑 갔었는데 속초에도 있었다.


카페에서 본 송림 너머의 바다도 너무 예뻤다. 이런 뷰를 보며 먹는 라떼는 천국 그 자체.


무계획 여행에서 믿을 건 스마트폰 뿐이었다. 핸드폰 충전할 겸 따뜻한 실내에서 몸도 녹일 겸 카페에서 스케쥴러를 쓰며 쉬었다. 백수일 땐 회사에 출근하고 싶은 마음에 회사일정, 개인일정으로 칸이 나누어진 스케쥴러를 사며 회사일정 칸을 채우는 날이 빨리 오길 바랐는데 막상 출근날이 다가오니 회사일정 칸이 채워지는 것보다 개인일정 칸이 채워지는 게 훨씬 반갑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아보는 속초해수욕장. 잘 있어 또 올게. 이날 휴무였던 옛북청아바이순대 영업하는 날 1인 세트 먹으러!


카페에서 핸드폰을 충전하며 저녁 먹을 식당을 검색했다. 점심에 허무하게 국밥과 오징어순대를 구경조차 못해본 게 아쉬워 이걸 파는 다른 식당을 찾아봤는데 터미널 가는 길에 있는 아바이마을이라는 곳에 국밥집이 몰려 있네? 네이버 길찾기에 물어서 아바이마을에 가는 버스 정류장에 갔더니 제일 빠른 버스가 30분 후에 온다고? 택시 탔다.


아바이마을은 이런 모양새였다. 저 길거리 양쪽이 다 국밥집.


가리국밥과 오징어순대+명태회.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세 음식의 콜라보는 굉장했다.


여긴 1인 세트가 없어서 일단 시그니처 메뉴인 듯한 가리국밥을 시켰다. 근데 국밥을 중간 정도 비워갈 때쯤 아무래도 속초의 상징? 같은 오징어순대를 구경조차 못해보고 이대로 돌아가기엔 아쉬웠다. 근데 이미 배는 거의 불러가고 순대 하나 시키기엔 분명 다 못 먹을 텐데. 사장님께 순대 남기면 포장 되냐고 여쭤봤는데 된다고 하셔서 순대 맛만 보고 남겨서 포장해갈 생각으로 소자를 시켰다. 기가 막힌 나의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가족들이 저 오징어 순대랑 명태회를 너무 맛있어 했다. 순대 대자 시킬 걸.




든든하게 저녁먹고 나오니 이런 예쁜 등대가!

 

식사를 마치고 속초시외버스터미널에 가기 위해 식당 사장님께 터미널 가는 경로를 여쭤보니 마을 입구로 가서 갯배를 타야 한다고 하셨다. 저 여기 택시타고 왔는데 배타고 나가야 한다고요? 알고 보니 갯배라는게 무슨 뗏목같은 것이었다. 무계획 여행으로 점심 식당 선정에 실패하여 아바이마을까지 흘러들어온 덕에 이렇게 예쁜 등대도 보고 배도 타본다.  


아바이마을에서 시내로 가려면 저 갯배를 타면 된다.


비용은 500원


갯배를 타고 시내 방향으로 이동하던 중 찍은 사진. 홍콩의 한적한 섬마을인 청차우 섬이 생각났던 아바이마을의 풍경.


갯배에서 내려 곧바로 터미널로 가기엔 시간이 조금 남아 서울 가기 전 바다를 한번이라도 더 눈에 담으려고 다시 찾은 영금정. 저녁 바다도 아름답다.


영금정에서 터미널 가는 길에 있던 건어물 가게에서 아빠를 위해 산 용대리 황태채. 아빠는 아무것도 사오지 말랬지만 막상 황태채를 사가니 너무 좋아하셨다.


다시 서울로.


무계획 머리 비우기 여행이 이렇게 끝났다. 이제 서울이라니! 이제 출근이라니! 생각보다 길었던 공백 끝에 회사원이라는 옷을 다시 입게 됐는데 내가 무사히 조직생활을 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고, 업계도 회사도 직무도 낯설지만. 이렇게 무계획으로 온 속초에서 어찌저찌 재미나게 잘 돌아다니고 잘 먹고 한 것처럼, 우연히 흘러들어간 그 업계에도 나름의 길이 있겠지. 다니다 힘들면, 다시 바다보러 오면 되겠지. 그래도 힘들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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