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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초 Nov 04. 2022

당신이 날 찾아올까 봐

가족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주민등록등본조회

때때로, 명절마다 당신은 기어코 나를 찾아낸다. 형식적 거주지 이전 신고를 해 둔 곳을 찾아와 묵묵히 서 있었다던 50대 남성의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마다 나는 소름이 돋는다. 당신은 왜 나를 찾아야 했나. 하등 도움이 될 것 없는 딸을 왜 뒤쫓고 스토킹 하고, 나는 그 흔적을 볼 때마다 굳어야 하나. 


이런 고민을 대부분의 가정폭력 피해자들도 겪고 있을 것이다. 특히 가족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이혼이 쉽게 되지 않는 것보다 더 심할 수도 있다. 부모에게서 도망치고자 하는 자녀들은 거주지 신고를 할 때마다 주민등록등본 상의 조회를 통해서 부모가 내 주소를 알고 찾아올까 봐 한참을 망설인다. 나는 그래서 첫 자취방에서도 보증금이 떼일 것을 걱정하면서도 전입신고를 못했고 해당 지역에서 제공하는 복지들을 한참이나 놓친 적이 있다. 뒤늦게 외가 친척의 집에 주소를 올려놓고도 나는 밤잠을 설쳐야 한다. 왜 당신은 나를 찾으려 하나. 누군가 내 주소를 묻고 물어서 찾아올까 봐 아무에게도 어디 산다고 말도 못 하고 오직 어떠한 관계도 없는 사람한테만 말할 수 있는, 내 주소.


집을 나온 후에 나는 주민등록등본 조회를 제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법 조항을 찾았다. 


⑥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2조 제5호에 따른 피해자는 같은 법 제2조 제4호에 따른 가정폭력행위자가 본인과 주민등록지를 달리하는 경우 제2항 제5호에 해당하는 사람 중에서 대상자를 지정하여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시장ㆍ군수 또는 구청장에게 본인과 세대원 및 직계존비속(이하 이조에서 “가정폭력 피해자 등”이라 한다)의 주민등록표의 열람 또는 등ㆍ초본의 교부를 제한하도록 신청할 수 있다. <신설 2009. 4. 1., 2021. 7. 20.> (주민등록법 29조 제6항)

법은 확실히 이전보다는 훨씬 나아지고 있었지만, 내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단서조항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단 피해자는 피해 사실을 상담기록, 경찰 기록, 시설입소 등의 기록을 통해 입증할 수 있어야 이 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그러니 나오기 전에 최대한 피해사실을 인정받으려 노력은... 해보자) 


그러나 내게는 입증할 수 있는 기록이 없었다. 왜 경찰을 부르지 않았냐. 왜 처음 집을 나올 때 시설을 생각하지 못했냐. 왜 상담시설에 도움을 구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그때의 내게는 고려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나는 경찰을 부르기 무서울 때가 많았고, 상담전화를 건다고 해서 바로 나를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직접 증거가 있어야 그 사람들이 그나마 나를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도와줄 수 있을 텐데 포착 자체가 쉽지 않았다. 

겪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가해 순간을 정확히 포착하는 건 쉽지 않다. 많은 피해자들이 몰래카메라를 쓰고, 사진을 찍는 등 최선의 노력을 다해도 언제 폭력이 일어날 걸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가해자의 행동 패턴은 단순하면서도 때때의 분위기에 따라 급변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측하려 노력하면 할수록 매 순간을 불안에 잠겨 지내야 한다. 

그렇게 까진 아니더라도 경찰을 부르면 된다고? 사건 기록은 충분히 남길 수 있다고?

증거가 없을 때에, 경찰과 사법조직이 내게 해 줄 수 있는 게 크지 않다고 느꼈다. 물론 법적인 제한도 있지만, 때때로 그들의 성의에 환멸이 날 때도 있다. 


이건 내가 집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을 때 일이다. 경찰이 내게 갑자기 전화를 걸었다. 

"아버님이 따님을 걱정하고 계세요."

그 경찰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따님이 걱정돼서, 경찰서에 가서, 가출신고든 실종신고든 하려 하셨다고. 내가 미성년자였다면,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따님이, 걱정된다는데, 당연히 집에 가라 그랬겠지. 다행히 나는 성인이고 거주지의 자유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솔직하게 "아버지를 피해서 집을 나온 건데요."라고 답했다. 나는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대해서, 그를 피해 집을 나와 잘 살고 있다는 것까지 솔직히 답했다. 그런데 최악의 일은 그다음에 닥쳤다.

"그래도 아버지가 걱정하시니까 대화한 번 해보세요."


???

가정폭력 피해자로 집을 나온 사람에게 아버지한테 전화를 해보라는 말을 하라니 이게 무슨 소리지? 

그런데 더 끔찍한 사실을 들려줄까? 나는 전화기 너머로 다른 사람의 기척을 들었고, 충격적인 말을 더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대화를 아버지가 듣고 있다는 건가요?"

대답은 "아버님 저리 좀 가보세요"였다. 세상에-

모든 경찰이 나쁘다거나 하는 얘기가 아니지만, 세상에-

내가 경찰을 믿을 수 있을까? 아버지가 내 문 앞에 서서 묵묵히 서있거나 문을 두드리거나 고함을 지르고 이웃주민들을 다 깨워도 내가 경찰을 불러서 이 사람이 나를 안 보게 해 달라고, 이 사람과 마주하고 싶지 않다고, 이미 충분히 맞은 다음이 아니라면 경찰이 내게 무언가 해줄 수 있을까?


물론 기존의 틀 안에서 경찰은 해야 할 일을 다했다. 성인의 실종신고를 묵살하지 않았고, 끝내 나를 찾았으며 지역 경찰이 직접 내게 전화하기도 하고, 나를 찾기도 했다. 많은 실종 사고들에서 피해자들이 받지 못했던 혜택이 자발적으로 도망친 내게는 무거운 짐이 되었을 뿐이다. 비록 내가 직접적으로 의사를 밝혔다고 해서 그들이 정말 내가 안전한지는 모르니까 확인하려 한 것이다. 그러니 경찰을 원망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내가 맞을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이 사법체계와 가족주의 자체는 평생 내게 그 사람의 이름을 지게 만들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 이 글을 쓰면서, 이 글을 읽는 피해자에게는 도망치기 전에, 기회가 된다면 시설입소를 하던가 상담을 구하던가, 간접적인 방법으로라도 증거를 모아서 제도적인 도움을 신청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평생 도망치지 않기를 기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법체계와, 법 제도를 구축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제발 이 법 좀 나아지게 해달라고 빈다. 


제발, 주민등록등본을 발급하기 전에 주소를 반드시 비공개로 하고, 필요시 자녀의 동의를 구해야만 확인할 수 있도록 나아가기를. 성인 자녀의 가출 시에도 "내가 걱정된다"며 경찰을 통해서 내가 어디 있는지 알게 하려는 그 노력이 "내가 피해를 당했다."는 진술 하나로 경찰이 이를 거절할 수 있게 되기를. 내 집 앞에 서있는 그 사람과 나를 3자 대면하게 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일 없이, 가정폭력 피해 신고만으로 접근금지를 신청할 수 있게 되기를... 제발 현행 방식보다 넓게 피해사실을 입증할 수 있기를. 확실한 증거를 찾아서 피해자가 끙끙대고 그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누구의 목소리도 묵살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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