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감옥에 갈 각오를 해야 할 줄은 몰랐다. 계엄령이라는 낯선, 포고령이라는 낡은 단어를 속보에서 접할 줄도 몰랐다. 3항에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는 지극히 70년대스러운 문구. 당연히 통제를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 그들이 쓴 "처단"이라는 단어의 대상이 될 수 있을 터.
이게 궁금했다. 12월 21일까진 감옥 가면 안 되는데. 세종 발레 디플로마 기말 공연과, 여름부터 준비한 비너스발레학원 1회 공연이 있으므로. 감옥에 바워크할 공간은 있을까도 궁금.
괴상망측한 농담은 여기까지. 여러모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으로 보내는 2024년 연말.
(노파심에, 이 글은 특정 정당 및 정치인을 지지하기 위해서 쓰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적어둔다. 내가 일하고 있는 모 언론사의 일원 자격으로 쓰고 있다는 게 아님도 분명히 밝혀둔다. 그저 자연인 브런치스토리 작가 Sujiney로 쓰는 100% 사견임을 혜량 해주시길.)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하지 않음으로써 뜻을 대신하며. 결국 다시, 발레 이야기.
나의 발레 고향, 발레조아. By Sujiney
지난주, 세종 발레 디플로마의 학기말 공연 이야기를 하며, 바워크와 센터워크의 클래스를 공연 무대로 올린다고 썼었다. 자랑스럽게 썼더랬지. 일상의 클래스를 공연으로 올리는 일이라니, 멋지다고. 지금도 그 공연의 형식이 멋지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멋지지 않은 건, 나의 폴드브라, 나의 턴아웃, 나의 그랑바뜨망, 등등.
철석같이 열심히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다.
비너스발레학원. 나의 에스메랄다 탬버린. By Sujiney
지난주 글을 쓰고, 순서 복기와 연습을 위해 찍은 연습 영상을 봤는데,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옆거울, 즉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앞모습이 아니라 옆모습이 되도록 찍었는데, 오 마이갓이었다. 실제 공연에서도 옆거울로 관객 앞에 설 텐데. 발레학원에선 대개, 앞거울을 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의 모습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옆거울은... 그야말로 진실의 순간(the moment of truth)였으니.
나름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것밖에 안 된다고? 이렇게까지나 못한다고?
내 생각으로는 팔을 등에서부터 늘려서 쓰고, 등은 잡고 갈비뼈는 닫고 있을 줄 알았지. 그야말로, 생각뿐이었다. 나름 노력한 결과가 고작 이것인가. 그 와중에 또 열심히 한다고 엄청나게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 자신이여. 깨어나라.
세종 발레 디플로마가 진행되는 세종대의 무용실 플로어. By Sujiney
취미발레 진실의 순간을 맞이한 옆거울 충격 사건 이후. 솔직히 침울했다. 나 나름 진짜 열심히 했다고요. 노력 엄청 많이 했는데 이것밖에 안 되나요. 모소 대나무처럼 몇 년 동안은 땅속에 있지만, 노력이라는 거름을 계속 주면 뿅 하고 싹을 틔워 엄청 빠른 속도로 성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침울해졌다.
발레의 신은 그래도 나를 버리진 않았는지, 그때 우연히 본 인스타 릴스. '흑백 요리사'의 안성재 셰프가 했던 얘기다.
"노력은 누구나 합니다. 하지만 노력을 해도 바뀌지 않는 게 있어요. 그때, '나는 노력했으니 됐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죠.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되게 하는 것, 그게 차이를 만듭니다."
이 말을 보고 일순 멍해졌다. 일일 블로그에도 썼지만, 안성재 셰프는 흙수저에서 스스로를 금수저로 단련한 인물. 그 과정에서 쏟았던 노력은 어마무시하다. 그 각오의 단단함.
그가 하퍼스 바자 인터뷰에서 했던 아래의 말. "노숙자로 살았던 적도 있어요. 집이 없어서 공원에서 자고 그랬죠. (요리를 위해선) 신용불량자가 되든, 노숙자가 되든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가는 게 더 중요했어요."
그래. 어찌 보면 몇 년 배웠는데 안 됐다고, 노력해 봤자 안 되는 것 아니냐고 징징대는 것 자체가, 사치다.
노력만이 답이 아닌 것이다. 노력을 했다는 말엔, 곧 대가를 바란다는 말이 행간에 녹아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으니, 실력을 내놓아라 발레여. 이런 식의.
하지만, 나는 이미 발레에 많은 것을 받았다. 매일의 쁠리에를 누르며 얻는 심신의 안정. 발레 플로어 위에 있는 시간만큼은,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기쁨. 나의 발전과 성장을 목청껏 응원해 주시는 감사한 선생님들. 모두, 발레 스튜디오 밖에선 찾기 어려운 심신의 행복.
실력이 더 늘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도, 감사한 일이다. 그 옆거울 영상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몰랐을 터다. 내 폴드브라가 개선될 수 있다는 것. 내 아라베스크가 지금의 세 배는 더 높을 수 있다는 것. 내 턴아웃이 지금의 1.8배는 더 될 수 있다는 것.
복기 노트. 다시, 시작. By Sujiney
어찌 보면, 옆거울 쇼크는 내게 쓴 약이다. 무작정 노력만 하던 내게, 발레의 신이 울려준 경종이다.
재미있는 건 선생님들도, 옆거울을 보고 쇼크를 받은 적이 있다고 말씀해 주신 것. 정빈선생님은 "저희 프로들도 가끔 영상 보면 완전 충격받아요, 좋은 경험 하신 거예요"라고 해주셨고, 시몬선생님도 "저 옆거울 보고 완전 쇼크 받아서 바로 소주 원샷하면서 운 적도 있어요"라고.
그래, 선생님들까지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데, 힘내자.
발레에 준 것만큼 받으려 하지 말자. 받을 생각은 말고 그저 어떻게 하면 순수하게 더 줄까를 생각하자.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하다 보면, 어느새인가 조금씩 나아져 있을 거다. 지금까지도 그러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