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jiney의 발레로운 매거진 72화
"예술가는 예술 안에서 자신을 보지 않고, 자신 안에서 예술을 본다." 이른바 '메소드 연기'라는 개념을 만든 러시아의 감독,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1868~1938)이 했다는 말이다.
언뜻 말장난 같지만, 연기라는 것의 핵심을 꿰뚫은 말이다. 연극이나 영화뿐 아니라, 발레 공연을 위한 작품에서도 중요한 말.
"예술 안에서 자신을 보지 않고"라는 말부터 뜯어보자. 이 말은 곧, 예술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앞세우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예술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거나, 자기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의미.
예를 들어 '카르멘' 솔로를 춘다고 하자. "내가 이렇게 어려운 작품에 도전했다구"라거나 "내가 이렇게 멋진 센 여자 캐릭터도 소화한다고"라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면 그건 예술을 나의 과시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반대여야 한다. '카르멘'을 위해 외려 '나'를 버려야 한다. 나를 잃고, 나를 잊어야 한다. 나를 잃은 그 빈자리에 '카르멘'을 녹여내는 것이다. 즉, 나는 카르멘을 위한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자신 안에서 예술을 본다"라는 의미일 것.
단, 여기에서 잃기로 선택하는 대상은 우리의 에고(ego), 즉 자존심이다. 자존감까지 다 버리라는 의미는 아닐 것. 춤을 추는 '나'라는 자존은 지키되, 나의 에고, 즉 나의 자존심을 앞세우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전설의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도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춤을 사랑한다. 나 자신을 완전히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무용의 대가, 마사 그레이엄은 이런 표현까지 했다고 한다.
"무용수는 자신의 춤의 하인이 되어야 한다."
최근 인상 깊게 읽은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의 서희 수석무용수의 말도 맥락이 같다.
"(상상하고 생각하는 걸 좋아하는데, 그건) 관객에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확히 간결하고 임팩트 있게 전하기 위해서예요. 하지만 그 상상에서 나를 배제해야 관객에게 가닿을 수 있어요. ‘나라면?’을 빼야 하는 순간··· 어렵죠. 내가 슬퍼하면 장면의 슬픔은 관객에게 닿지 않아요. 감성적인 장면엔 오히려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이성과 감성의 줄다리기가 팽팽해야죠."
서희 수석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유니버설발레단과 공연했을 때, 나는 블로그 리뷰에 이렇게 썼었다.
"서희 수석은 없었다. 줄리엣이 있었다."
이제,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조금이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김기민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무용수도 수년 전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라 바야데르'의 (남자 주인공) 솔로르 역할을 좋아하는데요, 어제는 용맹하고 거침없는 캐릭터로 솔로르를 표현했다면, 오늘은 조금은 우유부단하고 고민이 많은 솔로르를 연기해보고 싶어요. 관객분들에게 다양한 솔로르를 전달해 드리고 싶어서요."
김기민 수석 무용수의 말에도, 같은 깊이와 맥락이 있다. 자신의 에고는 버리고, 솔로르에 완전히 녹아들어서, 그 솔로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왜 그렇게 했을까 등을 끊임없이 고민한다는 의미였다.
스타니슬랍스키는 또 이런 말도 남겼다고 한다.
"연기를 보여주지 말아라. 그냥, (그 역할로) 살아라."
에고를 버리고, 자존심을 버리고 가벼워지자. 나를 잊고 다른 존재가 된다는 것. 결코 쉽지 않다. 그 과정에선 자존심 따위, 쓸모 없는 장식일 뿐. 진정한 감동,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예술의 그림자라도 맛보기 위해선 자존심을 버리고 나를 매개로 남이 되는 거다.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게 해준, 발레 학원 공연 연습. 감사할 따름. 부채 쓰는 건 아직도 서툴고, 나의 카르멘엔 에고가 가득하지만,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작품에 녹아들자. 나를 잊을 수 있는 그 진실의 순간을 위해.
By Sujin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