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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지 Feb 19. 2017

엄마와 밥



오늘은 일찍 일어난 편이었다. 회사 1박 2일 워크숍에서 돌아와 토요일 오후부터 잤다. 주말엔 끝없이 자면 좋으련만 몸이 허락하지 않는다. 늘 출근 준비를 위해 깨는 시간즈음 눈이 떠진다. 보통은 다시 자지만 오늘은 잠이 부른 탓에 그대로 일어났다. 덕분에 아침을 먹었다. 첫 끼니는 편의점 샌드위치. 대충 헛헛한 배를 달랜 뒤 침대에 앉아 은유의 책,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를 읽었다. 모처럼 방안의 볕을 즐기며 글을 읽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오늘 중 가장 평온한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빨래, 청소, 설거지, 쓰레기 분리수거. 한주동안 차곡차곡 쌓아 놓은 부스러기 같은 일상의 흔적을 치우니 어느새 다시 배가 고프다. 인간의 몸에서 가장 성실한 곳을 찾자면 아마 위가 아닐까. 쌀을 씻어 안쳐놓고 고기와 야채를 볶아 카레를 만들었다. 늘 먹어도 질리지 않는, 몇 안 되는 음식이다. 


점심을 먹고나선 동네 마트에 들러 내일 도시락으로 싸갈 반찬 재료를 샀다. 집에 돌아와선 마트에서 산 고기를 굽고, 몇 가지 밑반찬을 만들었다. 어쩐지 밥만 하다 하루가 끝났다. 근무가 없는 일요일, 굽고 볶고 닦으며 보냈다. 침대에 고된 몸을 누이며 '혼자 사는 것도 이렇게 버거운데'라고 중얼거렸다. 주말마다 밀린 가사노동을 '처리'할 때면 매번 드는 생각이다. 정말 그렇다. 



혼자산 지는 오래됐지만 자취는 이제 3년차다. 처음 나만의 방을 얻었을 때 설렘을 기억한다. 소박하지만 깔끔하고 감각적인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새하얀 탁자와 디퓨저, 체크무늬 커튼을 사고 새 베개커버와 이불보도 준비했다. 벽엔 잡지에서 잘라낸 사진을 붙였다. 어딘가 엉성했지만 그런대로 포근한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그 포근함이 유지되기 위해 수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새하얀 탁자에 뽀얗게 먼지가 앉는다는 것을, 체크무늬 커튼에도 곰팡이가 필 수 있다는 것을, 디퓨저 용액이 누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벽지에 붙인 사진은 습기를 잔뜩 머금고 쉽게 들뜬다는 것을 금새 깨달았다. 집이나 기숙사에서 언제나 그것들을 가꾸고 정돈하는 보이지 않는 노동이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본가에 내려간 어느 주말이었다.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엄마는 쇼파에 누워 휴대전화를 만지고 있는 내게 문뜩 그런 말을 했다. "이건 정말 끝도 없는 노동인 것 같아." 그때 엄마는 내가 서울에 올라갈 때 같이 들려보낼 밑반찬을 만들고 있었다. 그 한마디에 어딘가 쿵, 맞은 듯했다. 가사노동의 속성을 이토록 명징하게 드러내는 문장이 있었던가. 수많은 책에서 찾지 못한 쉬운 설명을, 엄마는 삶의 경험으로 뱉어냈다. 


나는 지금도 화장실 바닥에 떨어져 뭉친 머리카락을 치우며, 세탁기 안 쪽에 핀 곰팡이를 닦으며, 썩은 두부를 버리며 엄마의 말을 곱씹는다. 쾌적한 일상을 위해 열심히 가사노동이라는 쳇바퀴를 돌린다. 가끔 몸이 버거우면 불편함을 감수하고 이 모든 것을 포기한다. 하지만 엄마는 그럴 수 없다. 집에 마른 수건이 없을 때, 양말 짝이 안 맞을 때, 운동화가 꼬질꼬질해질 때 다들 엄마를 찾으니까. 하루종일 일하고서 다시 가사노동의 최전선으로 나간다. 그게 엄마의 '본분'이라고 말하니까. 그렇게 30여 년을 살아왔다. 


"역할. 역할의 꽃, 엄마 역할. 역시 '역할'은 생각을 요구하지 않는다. 영혼 없이도 가능하다. 현관에 들어서면 나는 엄마가 되어 기차가 레일을 지나가듯 현관에서 부엌으로, 부엌에서 식탁으로, 식탁에서 냉장고로 자동 왕복하는 거다. 사고하지 않아도 그냥 습관대로 하던 대로 막힘없이 수행한다. 이런 걸 무슨 숭고한 모성이라고 말하겠는가. 자기 손에 물 묻히기 싫은 사람들이 지어낸 말일 뿐, 누추하고 번거로운 집안일이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본분을 수행하는 동안 엄마의 등이 굽었고, 키는 더 줄었다. 함께 도자기를 빚는 아빠는 작품을 들고 일본으로, 미국으로, 러시아로 세상 구경을 다녔는데 엄마는 여전히 주방에 있다. 엄마의 비행 기록은 신혼여행 때에 멈춰있다. 그런 엄마에게 아빠는 종종 세상 구경을 하라고, 이 좁은 곳에만 있다보면 사람이 촌스러워진다고 말한다. 아빠는 알까. 아빠가 일본으로, 미국으로, 러시아로 떠나는 동안 집안이 저 스스로 굴러가지 않았다는 것을. 아빠의 넓어진 시야는 엄마의 희생으로 가능했다는 것을. 


전통적으로 성과 사랑의 주체는 남성이지만,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동은 여성이 담당한다. 여성이 노동을 그만두는 순간 대부분의 관계도 끝난다. - 정희진



인턴 시절, 부모님을 인터뷰하는 과제가 있었다. 그때 엄마에게 물었다. 도자기는 엄마랑 아빠랑 함께 만드는 것인데 늘 아빠만 소개되는 것이 속상하지 않으냐고. 엄마는 웃으며 괜찮다고, 행복하다고 답했던 것 같다. 그 대답을 듣고 한참 혼란스러웠다. 엄만 정말 행복한 걸까, 본인이 행복하다는데 내가 불편한 것도 좀 이상하지 않나. 


의문은 현재진행형이다. 여전히 나는 이 문제에 관해 깔끔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렇지만 엄마의 삶을 불행하다고 규정하고 싶지도 않다. 내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나는 가지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아빠와 함께하는 일에서 온당한 몫을 인정받고, 아빠를 비롯한 가족구성원은 엄마에게 미뤄왔던 가사노동을 수행해야 한다. 누구도 희생하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이 더 나아질 것이다. 


언젠가 엄마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괜찮아'라는 말보다 '행복하다'는 말이 먼저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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