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오후, 시청엘 갔다. 졸업하려면 따야 하는 자격증 시험을 그쪽에서 봤다. 40문항짜리 시험을 15분 만에 풀고 나왔다. 보통 이럴 때면 시험장을 나서면서 괜히 의욕 없는 나를 탓하는데, 오늘은 날씨가 참 좋아 그런 우울한 기분이 파고들 새가 없었다. 공기도 바람도 봄이라 계획 없이 산책에 나섰다. 시청 쪽이야 이런저런 기억이 남아있는 곳이니 길 잃을 염려도 없었고. 덕수궁 돌담길 따라 쭉 걸었다.
뛰노는 아이들, 손잡은 연인들, 뜨게옷을 입은 나무들, 연탄에 꽂혀있는 장미들. 그 풍경 위로 간간히 태극기는 위대하다는 둥 탄핵을 탄핵한다는 둥의 거친 마이크 소리가 들려왔지만 평온한 분위기를 망칠 수준은 아니었다.
서울시립미술관을 들렀다가 덕수궁 쪽으로 올라갔다. 어느 즈음에서 볕 잘 드는 돌담에 가지런히 널어놓은 방패 네 개를 봤다. 언젠가 오늘을 되짚는다면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은 장면이다. 탄핵 다음날, 긴장과 포근함이 공존하는 기이한 풍경.
고종이 티타임을 가졌다는 정관헌에 이르렀을 땐 탄핵 반대 집회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렸다. 성조기를 태극기보다 높게 치들던 그들에게 봄은 아직 요원해보였다.
시청역으로 가는 길엔 경찰들이 많았다. 도로에 열 맞춰 앉아있는 모습이 좀 생경했는데, 좀 더 걸어가보니 그 앞엔 경찰 방어벽이 세워져있었다. 생각해보니 그 벽 너머의 세상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토록 낯설었나.
역사 안의 경찰들은 잔뜩 지친 표정으로 계단에 앉아있었다. 그들 뒤로 보이는 낡은 공중전화기와 꼭 닮은 모습으로. 단단하게 무장했으나 결국 쓸모를 잃어버린 것들의 형상으로. 얼굴에서 한숨이 읽혔다. 이 지난한 싸움은 대체 언제 끝나는 건가 싶은.
마음껏 나른함을 즐길 수 없는 어느 초봄의 장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