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지 Mar 11. 2017

어느 초봄의 장면들



이른 오후, 시청엘 갔다. 졸업하려면 따야 하는 자격증 시험을 그쪽에서 봤다. 40문항짜리 시험을 15분 만에 풀고 나왔다. 보통 이럴 때면 시험장을 나서면서 괜히 의욕 없는 나를 탓하는데, 오늘은 날씨가 참 좋아 그런 우울한 기분이 파고들 새가 없었다. 공기도 바람도 봄이라 계획 없이 산책에 나섰다. 시청 쪽이야 이런저런 기억이 남아있는 곳이니 길 잃을 염려도 없었고. 덕수궁 돌담길 따라 쭉 걸었다.


뛰노는 아이들, 손잡은 연인들, 뜨게옷을 입은 나무들, 연탄에 꽂혀있는 장미들. 그 풍경 위로 간간히 태극기는 위대하다는 둥 탄핵을 탄핵한다는 둥의 거친 마이크 소리가 들려왔지만 평온한 분위기를 망칠 수준은 아니었다.


서울시립미술관을 들렀다가 덕수궁 쪽으로 올라갔다. 어느 즈음에서 볕 잘 드는 돌담에 가지런히 널어놓은 방패 네 개를 봤다. 언젠가 오늘을 되짚는다면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은 장면이다. 탄핵 다음날, 긴장과 포근함이 공존하는 기이한 풍경.


고종이 티타임을 가졌다는 정관헌에 이르렀을 땐 탄핵 반대 집회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렸다. 성조기를 태극기보다 높게 치들던 그들에게 봄은 아직 요원해보였다.


시청역으로 가는 길엔 경찰들이 많았다. 도로에 열 맞춰 앉아있는 모습이 좀 생경했는데, 좀 더 걸어가보니 그 앞엔 경찰 방어벽이 세워져있었다. 생각해보니 그 벽 너머의 세상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토록 낯설었나.


역사 안의 경찰들은 잔뜩 지친 표정으로 계단에 앉아있었다. 그들 뒤로 보이는 낡은 공중전화기와 꼭 닮은 모습으로. 단단하게 무장했으나 결국 쓸모를 잃어버린 것들의 형상으로. 얼굴에서 한숨이 읽혔다. 이 지난한 싸움은 대체 언제 끝나는 건가 싶은.


마음껏 나른함을 즐길 수 없는 어느 초봄의 장면들.

작가의 이전글 엄마와 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