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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안 Jul 01. 2021

죽음을 '생각' 하는 기억

장혜령 작가의 시집 [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노래한다] 를읽다가

앨리스 스프링스를 출발한 버스는 애들레이드까지 열몇 시간 정도 달려야 했다.  시간 달려도 풍경에 변함이 없는 사막을 내내 달리던 버스는 주위에 휴게소 건물 하나만 있는 외딴곳에 세워졌다. 예정된 30분의 휴게시간이 끝나고 버스에 다시 올라탔는데, 드라이버는 차에 문제가 있다고 2시간 정도 여기 머물게 되었다는 말을 전한다.


사막을 달리는 버스 안은 시동이 꺼진 상태로는 내부에서 오래 머물면 숨이 막힌다. 유일한 건물인 그곳의 작은 처마 밑에서 담배를 한 개비 꺼내고 있었다.


" 담배 한 대만 얻을 수 있을까?"


초점이 없는 푸른 눈동자의 그녀는 이 더운 날씨에 담요까지 어깨에 두르고 서서 내게 말을 걸었다. 건네 준 담배를 물고서 우린 나란히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 난 죽어가는 중이야. 가족들은 나를 모두 떠났어."


겉으로만 그랬는지, 정말 그랬는지 감정의 동요없이 흐린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며 내게 두 마디의 말을 던졌다. 나는 흠칫 놀랐지만 너무 요란스럽지 않게 " Really?" 라고 되물었고, 여전히 허공을 응시한 채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언젠가 태백의 노인 요양원에서 초등학교 2학년이던 나와 펜팔을 나누자 했던 노인이 떠올랐다. 그는 병에 걸렸고, 가족들은 모두 미국으로 떠났다고 했다. 여름 방학 어느 오후, 한참을 요양원 앞마당 벤치에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내가 떠나기 전 펜팔을 하자고 했다. 한두 번 편지가 오가고 그에겐 연락이 끊겼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는 진짜 죽어가고 있었다. 내 앞의 이 여인도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죽어가는 사람의 심정을 온몸으로 내뿜는 그녀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는 만난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았다. 아니 사실 같은 버스를 타고 몇 시간 왔고, 다시 몇 시간을 더 가야 하는 사이지만 이 순간의 강렬한 느낌을 남기고 싶은 것은 결례가 될까 봐 짧은 시간 긴 고민을 끝에 물었다.


" 네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


여전히 무기력한 그녀는 무심하게 YES라고 답하고는 중얼중얼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그녀의 조곤조곤한 영어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계속 들었다. 그러다 이 순간을 기억해야겠다는 욕망으로 한장의 사진을 남겼다.



때때로 떠오르는 강렬한 기억 중 한 순간이다. 그 기억이 20여 년 가까이 뚜렷이 각인된 것은 그때 죽음에 대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에 대해 이어 달리던 버스 안에서 오래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장혜령 작가님의 시집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를 읽다가 뇌 한쪽 구석에서 잠자던 기억이 불쑥 나왔다.



장혜령 시집 [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일본 사람들은 생각하다 라는 단어로 사고하는 것과 느끼는 것 양쪽 모두를 표현했다. 그들에게는 이성으로 사물을 탐구하는 일과 가만히 아름다움을 감각하는 일이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불태웠고 가장 좋은 때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유키의 아빠는 일본 문화의 모순과 미의 개념에 관한 책을 썼다고 한다. 책을 쓰던 사월에 유키가 죽었다. 슬픔 속에서도 그의 머릿속에는 서문 마지막에 들어갈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꽃잎처럼 져간 사랑하는 딸을 보내며,라고만 썼다. 그는, 딸을 보내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 사람의 방식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시집의 첫 번째 시 '눈의 손등' 중-




작가님의 낭독하는 모습이 자연스레 연상되는 시들을 아침 햇살 아래 조용히 읽어 내려간다. 어떤 음악이 어울릴지 상상해본다. 그러다 마주한 나의 기억에 들어간다. 작가님의 시 안으로 들어가다가 나는 내 안의 '시' 같은 순간을 마주한다. 죽음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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