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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Nov 02. 2023

이스라엘 공부 (6) – 반유대주의의 역사

이스라엘 공부

이스라엘 공부 (6) – 반유대주의의 역사

    


(1)   고대 이집트부터


아주 옛날부터 반유대주의가 있었다. 이집트인은 유대인이 반사회적이라고 생각했다. 같이 음식 먹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코셔 음식이 아니면 먹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들과 테이블에서 어울리기를 거부했다.

  

  

(2)   로마제국에서는


로마는 유대왕조를 무너트린 후에 그들을 그곳에 내버려 두지 않았다. 로마는 정복한 지역민이 섬기는 신을 존중해 주었다. 로마에 있는 판테온 신전은 피정복 지역의 신에 대한 존중이 담겨 있다. 그러나 유대인은 다른 사람들이 섬기는 신을 혐오하고 무시했다. 유대인은 로마 황제의 권위를 무시했다. 그것은 로마 제국에게는 큰 위협으로 여겨졌다.

  

  

(3)   기독교 초기에는


로마에 의해 멸망당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으로부터 흩어진 유대인은 대부분의 흩어진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자신들의 문화와 종교를 잊고 살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유대인을 위협적인 세력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잠시 잊혔다.


 

(4)   이슬람이 등장하고부터는


기독교 제국이었던 유럽에 이슬람이라는 절체절명의 적대 세력이 동에서 그리고 남에서 위협을 가해왔다. 기독교 제국은 자신들을 지키는 것이 필요했다. 그런데 자신들 내부에도 기독교가 아닌 세력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서구 사회 유일의 이교도 집단이 있었는데, 그것이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은 점차 악마화되기 시작했다. 아이의 피로 제사를 지낸다든가, 마을의 우물에 독약을 뿌렸다든가, 전염병을 창궐하게 했다든가, 그들이 괴물이라든가와 같은 이야기가 만들어졌고, 널리 퍼졌다. 유대인은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었다.


 

(5)   르네상스 시대부터


사람들이 성경을 직접 읽기 시작했고, 이성적 사고가 진전을 보이며 반유대주의에 대한 반성도 일어났다. 그러나 신앙심 넘쳤던 프로테스탄트는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에 대한 관용성을 점점 잃어 갔다.


 

(6)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부터


유대인은 무역과 금융에서 재능을 보였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유대인에게 부가 집중되었고, 경제 위기가 일어날 때마다 위기의 원흉으로 유대인이 지목되었다.



 

(7)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


나폴레옹이 등장하고 유럽이 전쟁터로 변하면서 같은 언어와 같은 문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하나의 정치체를 만들어서 살자는 생각이 번졌다. 같은 문화권 사람들 속에는 드문드문 유대인 무리가 있었다. 유대인 마을의 존재는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던 민족에게 몹시 껄끄러웠다. 그들은 거주지에서 쫓겨났고, 폴란드 동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서부 지역에 거주가 제한되기도 했다. 이주를 거부하는 유대인에 대한 대량 학살도 있었다. 유대인은 자신들만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곳은 자연스럽게 팔레스타인 지역이 되었다. 하나둘씩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시오니즘이라고 불렀다.


 

(8)   나치가 등장하면서


민족주의 최악의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나치가 등장하면서 반유대주의는 극에 달했다. 제정러시아, 소련에서의 반유대주의도 그에 못지않았다. 히틀러가 소련과의 전쟁을 선포했을 때, 처칠은 즉각적으로 소련을 도울 것임을 선언했다. 공산주의가 공동의 적이라고 생각했던 히틀러는 처칠의 즉각적인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은 모두 영국과 소련을 사주하고 있는 유대인의 음모라고 생각했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주장하던 미국은 유럽의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처칠이 그토록 참전을 종용했지만 꿈쩍하지 않던 루스벨트가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히틀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뉴욕을 장악하고 있는 유대인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유대인이 영국과 소련과 미국에서 독일을 없애기 위해 선전선동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음모론을 만들어 유대인에 대한 분노를 전쟁에 이용했다.


 

(9)   이차대전이 끝나고


이차대전이 끝나고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설립을 용인하려고 했다. 오랜 반유대주의의 결과로 UN의 분할안에 따른 이스라엘 땅에는 이미 유대인이 아랍인보다 많아졌다. 유대인이 더 많아진 땅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아랍인이 여전히 더 많은 땅에는 팔레스타인이라는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 UN의 생각이었다. 이것은 홀로코스트를 견딘 유대인에 대한 연대감이나 보상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차대전을 겪으면서 유대인은 자신들의 거주지인 지금의 동유럽 지역으로 돌아가길 원하지 않았으며, 미국이나 영국이나 그래도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나라로 가고 싶었지만, 그들은 문을 걸어 잠갔다. 유대인이 모두 부자거나 아인슈타인처럼 똑똑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선택적으로 유대인을 받았고, 다수의 가난한 유대인은 갈 곳이 없었다. 그들은 골칫거리였고, 그들이 팔레스타인에 모여 나라를 만들어 산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10)  중동전쟁을 거치면서


유대인은 살아남기 위해 전쟁했다. 이스라엘은 유대인의 나라를 만들고, 팔레스타인은 아랍인의 나라를 만들면 되었다. 그것이 유대인의 생각이었다. 극우 유대인 중에 아랍인과의 공존을 원하지 않은 세력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공존을 원했다. 주변의 아랍 국가는 공존을 원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을 지도상에 없애버리길 원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선제공격을 하기도 했고, 한 발의 폭탄을 맞으면 열 발의 폭탄으로 보복했다. 이스라엘의 군사력 사용은 과도한 것으로 보였고, 전 세계의 여론은 이스라엘을 질타하기 시작했으며, 반유대주의는 그때마다 번성했다.


 

(11)  하마스와의 전쟁이 터지면서


하마스는 로켓을 무차별 난사했고, 뮤직 페스티벌에 나타나 민간인을 학살했으며, 민간인 마을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을 잡아가 인질로 삼았다. 이스라엘은 보복공격으로 로켓을 날려 가자지구의 일부를 초토화했고, 많은 민간인이 죽었다. 그리고 이제는 지상군 투입을 목전에 두고 있다. 지상군 투입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각한다. 로켓으로 공격하는 것보다 지상군이 가는 것이 민간인 사상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있다. 이스라엘 유대인은 테러는 타협을 먹고 자란다고 생각한다.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스라엘 지상군의 가자 진격은 반유대주의를 살릴 것이다.


유대인은 잘못을 저지르지만, 많은 다른 민족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다음 공부에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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