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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 꽃잎들로 채워진 보랏빛 수국의 영국식 꽃말

뉴질랜드에서 술 취해 그림을 헐값에 팔아넘긴 이야기와 직접 그린 수국그림

by 논이

2년 전 제주도 서귀포의 어느 가을날, 친하게 지내는 동네 강아지 웅이가 사는 집 앞을 지나다 골목길 위에서 바람을 타고 뭔가가 굴러가는 걸 발견하고 시선을 집중했어요. 옅은 갈색에 컬이 잔뜩 들어간, 북실거리는 둥근 타원 모양의 공이 가을바람에 굴러가는 모습에

'뭐지? 푸들 머리 같은데?'

허리를 굽혀 살펴보니 시들고 바짝 말라버린 수국꽃 한 덩이가 바람결에 굴러다니는 것이었어요. 수국은 시든 모습마저 처연하도록 아름다웠습니다.


수년 전 어느 여름, 세밀화 공모전에 도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식물세밀화 과정을 공부하기 전이라 꽃사진보고서 그저 똑같이 그려내면 될 거라 쉽게 생각하며 좋아하는 여름 꽃 수국을 주제로 정하고 몇 해 전 뉴질랜드에서 직접 찍어온 수국 사진을 보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리다 보니 아무리 그려도 끝이 없는 징글징글한 꽃잎들과 너무나도 그리기 까다로운 깻잎같이 생긴 잎의 짜증유발 생김새에 몇 번이나 좌절하고 그리기 싫은 마음이 올라와 게으름을 피우다 공모전 마감일이 그만 코앞에 닥치고 말았어요. 어릴 때부터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실행하는 벼락치기 인생을 살아왔기에


'까짓 거 밤새워 그려내면 돼. 할 수 있어.'


하며 이를 악물고 그림을 그리는데 그려도 그려도 끝이 나질 않았고, 결국 밤을 꼴딱 새우고 새벽이 되어도 그림은 끝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토록 사랑했던 수국꽃이 꼴도 보기 싫어지고 개미지옥 버금가는 수국지옥에 빠져 허우적대며 작업하는데 색연필을 칼로 깎는 것조차도 버겁게 느껴지고 뭔 놈의 잎맥은 그렇게나 많던지 힘겹게 그림을 그리던 그 밤의 악몽이 기억납니다. 잠을 못 자고 무리해서 그림을 그린 탓에 눈앞에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헛것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아침이 왔고, 여차저차 마무리되어 부랴부랴 그림을 싸들고 서울의 모 여대에 있는 접수처로 버스와 전철을 타고 갔습니다.


밤새 작업한 탓에 지하철 안에서 입을 벌린 채 열심히 상모를 돌리고 침도 질질 흘리며 도착해 그림을 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다음 목적지로 들른 곳은 청담동의 어느 미용실이었어요. 라디오에 보낸 사연이 방송돼 선물로 헤나염색을 할 수 있는 헤어상품권을 받고 신이 나서 머릴 밝게 물들이러 갔건만 헤나염색은 검은색만 할 수 있다고 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머릴 들이밀었습니다. 이윽고 마녀의 검정고양이처럼 시커메진 머리카락을 말리며 디자이너가 머릴 좀 다듬어야겠다고 헤어컷을 강력히 권유하길래 거절 못하는 착한 병 걸린 아가씨였던 저는 동공이 흔들리며 소심하게 오케이 했지만 속으로는 난리가 났었습니다.


'이 비싼 청담동 미용실에서 머릴 자르다니 미쳤구나!'


머리카락을 자르고 머리끝을 굵은 웨이브로 말아주는 드라이를 받으니(머리 하는 동안에도 계속 상모 돌림) 공주처럼 아리따워진 제 모습을 거울로 볼 수 있었어요. 제 인생 가장 비싼 헤어컷이었지만 만족도는 1000%였고 목디스크 걸린 여자처럼 한껏 도도해져 공주머릴 휘날리며 친구를 만나 이른 저녁밥을 먹고 스윙댄스바에 가 춤을 춘 살인적인 스케줄을 밤을 새우고도 소화해 낸 그날의 제가 지금도 놀랍습니다. 이제는 매일 8시간을 자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데 어릴 땐 밤을 새우고도 별짓을 다 했었군요.


며칠 후 공모전 결과 발표가 나고 오만함과 게으름으로 임한 과정의 예상대로 낙방했지만 힘들게 벼락치기로 그린 아픈 손가락 같은 그림이기에 포트폴리오백에 넣어 외국에 갈 때마다 함께 했습니다. 2011년 말, 뉴질랜드 로토루아 아트빌리지에서 두 달간 입주화가로 운 좋게 뽑혀 그림 그리게 되었을 때 이 수국 그림을 직접 칠한 흰 액자에 넣어 전시해 놓고 리셉션 파티에서 준비된 공짜 와인을 신나게 들이붓던 그날만 생각하면 15년이 지난 지금도 땅을 치고 웁니다.


왜냐고요? 제가 공짜술에 거하게 취한 나머지 수국그림을 사고 싶다는 분께 디스카운트를 해주겠다며 자진해서 왕창 깎아 헐값에 팔아넘겼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데 걸린 시간이 40시간이 족히 넘는데 200달러에 팔았으니 시간당 5달러, 당시 뉴질랜드 환율로 10불이 7~8천 원이었으니 헐값도 아닌 똥값이라 부르고 싶을 정도로 싼 가격이었습니다.

그다음 날 술에서 깬 저는 뭔가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엎드려 땅을 치고 울부짖으며 후회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이미 그림값은 지불되었고 그림은 팔려갔기 때문이었죠. 그림을 사가신 분은 로토루아에서 부자로 소문난 분으로 제가 그림 가격을 2000불에 불러도 충분히 사고도 남을 분인데 저는 왜 그랬을까요? 그렇습니다. 술이 웬수입니다. 아니, 술에 취했다 하면 세상 쿨한척하며 지밥그릇 못 챙기는 호구가 되는 제가 원수입니다(제정신일 때도 호구임).


그렇지만 좋은 술버릇도 공존합니다. 술에 취해 잠들었다 아침에 깨면 우렁각시가 왔다 간 듯 집안이 온통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거든요. 저는 치운 기억도 없는데 너무 신기합니다. 술기운이 오르는 동시에 집안을 말끔히 청소하고 깔끔히 정리 정돈하는 게 제가 자랑스러워하는 술버릇입니다.


호구와 청소부.

네, 저는 술만 취하면 호구나 우렁각시가 됩니다. 요즘은 맥주 한 캔만 가끔 마시니 저를 이용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시길 바랍니다. 청소하기 싫다고 또는 그림값 깎아달라고 저를 술 먹여서 호구처럼 부리면 결코! 안될 일입니다. 그렇지만 공짜 술은 마다하지 않습니다.



제주에서 만난 보랏빛 수국꽃들. 제주 수국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Hydrangea flower meaning

Hydrangeas held a slightly darker meaning in Victoria era Europe as they were often associated with arrogance. Their lush, unique petals lead people to link them with vanity. Fortunately, those outdated sentiments have faded.

Their large blooms were believed to demonstrate boastfulness and vanity, and Victorians also sent blue hydrangeas to love interests who rejected them to criticise their frigidity and general heartlessness.


수국꽃의 의미

빅토리아 시대 유럽에서 수국은 오만함과 연관되어 다소 어두운 의미를 지녔습니다. 무성하고 독특한 꽃잎은 사람들에게 허영심과 연관 지어졌습니다. 다행히도 그런 시대에 뒤떨어진 감정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큰 꽃이 피는 것은 허영심과 허세를 나타낸다고 여겨졌고,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자신을 거부한 연인에게 파란색 수국을 보내 그들의 냉정함과 무정함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Victoria era : 빅토리아 시대

*accociated with : -와 연관된, 관련된

*arrogance : 오만한

*lush : 풍부한

*petal : 꽃잎

*vanity : 허영심

*outdated sentiments : 시대에 뒤떨어진 감정

*demonstrate : 보여주다, 증명하다

*boastfulness : 자랑, 허풍

*criticise : 비판하다

*frigidity : 냉담함

*heartlessness : 무정함, 냉혹함


꽃말 출처 :

https://flowersvasette.com.au/language-of-flowers-hydrangeas/

https://www.appleyardflowers.com/flowerdiaries/hydrangea-facts/#:~:text=Their%20large%20blooms%20were%20believed,their%20frigidity%20and%20general%20heartlessness.




종이 위에 수채. 논이 그림 2011


종이 위에 수채 2007. 논이 그림


술 취해 헐값에 넘긴 바로 그 수국그림. 종이 위에 파버카스텔 수채색연필 A3. 논이 그림 2009


캔버스 위에 아크릴
종이 위에 수채. 2017-2018 논이 그림

감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많은 그림 보러 놀러 오세요!


인스타그램 @nonichoi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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