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해석하는 시각.
조금 잘못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마음이 슬픈 사람이라고,
그리고 마음이 조금은 연약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건 어쩌면 잘못된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떨어지는 비에 맞춰 내 마음이 장단을 두드리고
투닥투닥 부딪히는 자판기 소리에
그 장단을 옮겨 적는 일.
이 행위 자체가 비가 내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데
어째서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
슬픈 사람이라고 하는지.
비 내리는 소리를 반가운 소리라고 느껴 반겨주고
비가 내리고 난 후의 젖은 땅,
아침 공기에 발끝을 내딛으면
온몸의 털끝이 바짝 서는 듯 한결같이
쭈뼛하고 시원한데 어째서
비를 음울하다고 표현하는 건지.
이만큼 사람의 감정을 잘 녹여낼 수 있는
날씨가 또 있을 수 있나 싶다.
사람이 너무나도 솔직해지는 날씨,
그리고 너무나도 그리워지는 날씨,
하지만 너무나도 따뜻해지는 날씨.
오죽하면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겠는가.
아마 그 속담을 만들어낸 사람은 가랑비가 반가워
그 속을 한참 뛰다가 문득 내리는 비에 아이처럼 젖은 본인 기분에 놀라 멈칫하여
그제야 눈앞으로 떨어지는 빗 가닥을 바라보며 '요것이 요물이구나' 감탄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 옷이
흠뻑 젖어있는 것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붓을 들고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 갔겠지
"가랑비에 옷이... 젖는 줄을... 몰랐다"하고.
그런데 그게 마치 현인의 구절처럼
은근한 은유를 입어가며
우리 세대로 전해져내려 온 것이 아닐까 한다.
뭐, 아님 말고.
반가운 음악이다.
이 날씨에 두드려대는
키보드 소리는 더욱 진국이다.
빗소리에 실려 저만치 떠나가는
내 마음이 예쁘기도 하다.
혹시 나 자신도 몰래 그리운 이가 있다면
빗방울에 스며들어 마구 마구 떠다니다가
잠깐 멈춰서 그 사람 잠드는 머리맡 창가에
말없이 한 방울 흘러주었으면 싶기도 할 만큼.
미운 이도 떠오르고 고마운 이도 떠오르고 사랑하는 이도 떠오르고
심지어 웬수도 떠오르는 걸 보니
하늘이 주는 선물은 틀림없이 맞는가 싶다.
"니 웬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을 하느님이 남기셨다고 성경책에도 있는 걸 보니.
첫사랑이 내게 선물한 곰돌이 인형이
배꼽을 잡고 웃는 것 같다.
"저것이 비가 오는 걸 즐기더니
드디어 주파수가 나갔구나"하는 듯싶다.
이런저런 의미나 상황으로 봤을 때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
약간 또라이라는 말이 영 거짓도 아닌 듯싶고...
비만 오면 확장되는 내 감성의 와이파이에
출처불명 랜섬웨어 타고 들어오기 딱 좋은 날씨다.
그만큼 열려있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한 그런 날씨.
비도 오고 촉촉하고 시간은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가는 데
빗소리 핑계 대며 그만 밤새우고 흐르는
물에 눈알이나 씻고 잠들어야겠다.
어쩐지 나가버린 정신만큼 눈앞도
침침해질 것 같은 안갯속으로
내 손을 잡아끄는 이 습도가 참 좋다.
옥상에 선베드 하나 갖다가 놓고
다음에는 해 안 나고 촉촉하니,
오늘처럼 비 오는 날 올라가서
흠뻑 젖고 내려오자 다짐하며
오늘의 일기는 빗소리랑 같이 타고 들어온 레이니즘에 취하고 마무리.
그럼 이만 나는 "구질구질하고 눅눅하고
음산하고 어두운 비 오는 날씨가
아름답지 않은 듯 이야기하는 것은
'피자에 파인애플 얹으면 불법 아니냐'고
불평하는 것과 같은 근사한 모순이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아주 황홀한 꿈나라로.
오늘 하루의 마무리와 내일 하루의
시작이 동시에 정말 끝내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