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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안솔 Nov 10. 2023

생선가시 발라주는 남자

D는 키가 아주 컸다. 채치수를 연상시키는 첫인상이었다. 성격은 외모와는 다르게 내향적이고 차분한데 수다스러웠다. 이 수다스러움이 재밌으면 매력적인 사람이 되는 건데 그의 수다스러움은 TMI가 넘쳐서 남성미를 상쇄시켰다.


대화가 딱 잘 되지는 않았다. 같은 주제에 대해 그도 말을 하고 나도 말을 하는데 그리고 말이 끊이지는 않는데 의미 없는 말들이 공기 중에 흡수되는 느낌이었다. 그는 내 생각을 그다지 궁금해하지도, 내 관심사에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의 관심사가 내게도 그다지 흥미롭게 들리지 않았던 걸 보면 우리는 노력 없이 존재 자체로 잘 어울리는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같이 있을 때 재미가 있지는 않은데 편했다.


첫 만남에서 나는 그에게 이성적인 끌림을 느끼지는 못했다. 작년의 나였다면 그를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을 테지만, 현재의 나는 우선 나이를 한 살 더 먹었고, 내 또래의 남자를 만나기 어렵다는 현실을 알뿐만 아니라, 그 또래 남자가 나에게 관심이 있을 확률이 현저히 낮다는 것도 안다. 작년 이 맘쯤에 나 좋다는 남자를 마다하고 이별 후폭풍을 겪었던 터라, 싫지 않은 상대가 나 좋다고 하면 무조건 만나야지 다짐을 했었다. 게다가 이번 상반기에 만났던 남자에게 마음이 크게 다쳐서 독선적인 사람은 절대 안 된다는 경험치도 생겼으므로 내 또래에, 착해 보이는 그가 나쁘지 않았다.


그도 내가 나쁘지는 않았나 보다. 첫 만남 후에 마침 일주일간 휴가였던 그는 매일 나를 만나러 왔다.


세 번째 만난 날, 비가 많이 왔다. 우리는 약속 장소였던 백화점에 갇혔고 결국 6층 식당가에서 식사를 해결하기로 했다. 선택권이 많지 않았고 문안해 보이는 한정식집에 갔다. 매운탕과 생선구이가 반상과 함께 정갈하게 나왔다. 그는 본인 음식은 뒷전이고 먼저 탕을 덜어 나에게 주더니 고등어구이에 젓가락을 갖다 댔다. 마치 도전과제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작은 가시는 젓가락으로 발라내고 생선대는 야무지게 손으로 발라내고선 곱게 발라낸 생선 살 한 점을 내 밥 위에 올려놓았다.


그의 사소한 이 행동은 내 마음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켰다. 생선가시 발라줬을 뿐인데, 심지어 나는 젓가락질을 아주 잘하는 옛날 사람이고 생선가시 바르는 걸 귀찮아하지 않을 정도로 생선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래서 생선가시 발라줄 사람이 필요하지도 않은데 다정한 그의 행동에 내 마음 문이 열렸다. 그것도 활짝.


2023년 하반기는 생선가시 발라주는 너로 정했다. 잘해주는 이 남자가 내 생애 마지막 남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솔직히 한 것 같다. 나는 그에게 아주 쉽게 마음을 줬고 우리는 그렇게 연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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