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rie(1976) | 브라이언 드 팔마 | 스릴러/로맨스
흔해 빠진 스토리라는 외연을 두르고 끝까지 가는 영화가 있다. 어긋한 종교적 신념으로 마을 전체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는 천주교인 어머니와 초능력을 가진 딸이 서로를 마지 못해 공격하고 급기야는 마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이야기. 이단자의 섬짓함과 사춘기 소녀의 폭발적인 에너지가 뭉치면 어딘가는 크게 무너져 내리고 만다는 전언적인 스토리 구성은 재기발랄 하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이처럼 예견 가능한 영화에서 카타르시스는 어디서 생겨나는가?
언젠가는 무너져내리고 말 것이라는 공포를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느낀다. 그래, 아름다운 시절의 이름들은 새까맣게 타버리고 말지. 우리도 그쯤은 안다. 남은 재까지도 박박 모아 달아나는 21세기형 악마들이 도사리고 있는 현실에서 학교 폭력 이야기는 더 이상 구전되지도 않을 현실이자, 사소한 사회적 병패 그 어디쯤이 아닌가. 누구하나 죽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정의 실현을 상상할 수 있나.
영화는 구축과 파괴, 두 개의 플롯을 엮음으로서 카타르시스를 만든다. 먼저, 여고생의 샤워실에서 시작되는 오프닝 시퀀스는 과잉 에너지로 가득하다. 천진난만한 얼굴을 한 여고생의 벗은 몸을 훝고 지나가는 카메라 중앙에 주인공 캐리가 있다. 흐르는 물을 맞으며 천천히 씻어내려가는 손을 통해 그녀의 몸은 성적 대상이 되고, 앙상한 몸이지만 풍만한 가슴을 가진 그녀의 신체는 어느덧 관객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전개되는 갑작스러운 월경 공포. 다리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본 캐리는 급박한 불안에 시달리고, 급기야는 피가 잔뜩 묻은 손으로 친구들에게 달려가 매달린다. 동급생들은 혼자 벌거벗은 캐리의 몸에 온갖 생리 용품을 던지기 시작한다. 사건 이후 월경이 남성의 성적 동요를 일으킨다는 흉포한 신념으로 딸을 벌하는 엄마는 또 얼마나 폭력적인가.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표정을 숨기지 못하던 캐리는 여성 체육 교사와 동급생 '수'의 의도 없는 선의로 점차 회복된다. 캐리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 시를 쓴 남자 아이의 손에 이끌려 참석한 졸업파티(옛날 영화 특유의 도덕적 결함이 보이는 장면이지만 잠깐 묻어두고)는 생각보다 더 매끈하게 아름다운 방향으로 흘러간다.
스포일러가 시작됩니다
이제, 파괴가 시작될 차례. 돼지피를 가득 담은 양동이는 캐리가 정확히 그 밑으로 걸어오길 기다린다. 캐리는 베스트 커플로 뽑혀 무대 위로 올라오고 친구들이 그런 캐리의 모습을 동경하며 바라보는 순간 비극은 시작된다. 피의 공격은 목표를 잃을 초능력자의 분노를 도구삼아 도육의 세계로 나아간다. 영화가 선택한 카타르시스는 '전방위적인 죽음'이다. 캐리를 도우려 온 구원자도, 방관자도 다 죽여버리는 결말. 구원자의 한끗 실수도 죽음으로 다스리는 호연함. 폭력에 기여한 자, 모두 죽여버리리. 언제 보아도 참 속시원한 결말이다.
캐리가 피칠갑을 하고 악인을 처단할 때 사용된 슬로우 모션과 퀵줌 기법은 그제까지 쌓아온 찢어지는 사운드와 함께 연쇄적으로 병치된다. 섬찟한 장면이 갑작스럽게 보여질 때, 밝고 청량한 종소리를 사용한다던지의 독특한 사운드 기법은 미장센의 이질감을 더욱 선명하게 표현한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행복할 수 있을거라 기대했던 캐리의 맑은 표정은 이제 인간의 형상을 하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연극이 막을 내린 뒤 커튼콜을 볼때면 눈물이 났다. 공연이 시간과 공간이 만든 실체를 비틀고 다듬고 부풀리며 감정의 골자를 만든다면 그 시공간 속 아름다움은 다시 보지 못할 순간임을 알기에 특별히 슬펐다. 졸업 파티에서 캐리는 처음으로 친구들의 동경어린 주목을 받게 된다. 자신이 직접 재봉한 옷을 입고 짝사랑하던 남자 아이와 오른 첫 무대에서 과거의 트라우마를 그대로 반영한 크리티컬 데미지를 받은 캐리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지만 그 전까지 그녀는 일생일대의 행복 앞에서 눈물을 훔치는 소녀일 뿐이었다. 사라져버릴 것들은 연약한 얼굴을 한다.
카타르시스 : 정화, 배설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고 했다. 감정이 순화되거나 깨끗해지는 일종의 배설, 정화 작용. 비극에서 다루어지는 공포와 연민의 정서적 효과를 이야기하며 많이 사용되는 용어다.
참고) 김정희,『스토리텔링이란 무엇인가』,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