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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Mar 17. 2023

망할 딸년을 어쩌면 좋을까

너는 도대체 누굴 닮은 거니?

방학 내내 아내와 딸 사이 모녀대전(母女大戰)의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고 이제는 따뜻한 봄날과 함께 평화가 찾아오나 싶었던 창원시 성산구 어느 집에 때아닌 겨울이 찾아왔다. 새로운 긴장국면이 조성된 것은 양강체제 속에서 아슬아슬 실리외교를 추구하던 내가 아내를 도시녀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에 돌입하여 무게 중심이 아내 쪽으로 살짝 기울어지면서부터였다.


마치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어 두 나라의 눈치를 보다가 호기롭게 '나는 미국 편, 이제부터 중국은 패싱'을 외쳤다가 중국으로부터 호되게 보복을 당하고 있는 현 정권의 멍청한 우두머리처럼 잠깐의 방심이 불러온 결과는 실로 상당했다.


기다리고 있으면 자신에게 뭔가 떡고물이라도 떨어지려니 기대했던 딸아이는 처음 얼마 동안은 모든 것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주문했던 워치와 무선 이어폰이 도착하고 각종 케이스와 액세서리들이 줄지어 집으로 올 때까지도 딸아이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문제는 마지막으로 주문한 무선 충전기가 도착하는 순간 발생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최저가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받는 사람 이름을 딸아이 이름으로 저장해 둔 쇼핑몰에서 무심결에 결제버튼을 누르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왜 배송 메시지가 오지 않는가 의문이 들었지만 도착할 때까지도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았을 때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기쁜 마음을 안고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의 실망 가득한 눈빛 속에서 아내는 지은 죄 하나 없이 죄인처럼 구석에 처박혀 워치와 무선 이어폰을 만지작거리며 눈치만 보기 시작했다. 언제 어느 시에 폭발하지 모를 시한폭탄을 가슴에 안고 살 수는 없는지라 내가 쓰던 에어팟을 아무 조건 없이 주겠다는 중재안을 제시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작은 불씨에 기름을 퍼붓는 듯한 역효과를 가져왔다.


"싫어, 더러워."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문을 걸어 잠근 딸아이를 보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단지 형님 두 분을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물려받았던 나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두 분 형님이 분가해서 나갈 때까지 옷도 물려받아 입고 너덜너덜해진 책도 물려받아서 보는 것에 대해 불만은 있었지만 전혀 티 내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는데 아무리 세상이 달라졌다고 해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아내도 이번만큼은 절대 물러서지 말라며 이 기회에 버릇을 고쳐놔야 한다며 힘을 보탰다.


그 후 팽팽한 힘겨루기가 계속된 것이 일주일 정도, 적어도 항복문서에 서명 정도는 받아야겠다고 생각할 즈음 힘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내가 딸아이에게 새 운동화를 사주는 태세전환을 하며 묵시적 동맹관계에 균열이 오면서 무게중심은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어갔다. 게다가 내 편이 되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어머니께서는 "가끔 한 대 걸러서 닮는 경우가 있다더니 우리 귀한 손녀가 너거 아버지 닮았는갑다. 너거 아버지가 새 거만 찾는 사람이잖아."라고 말씀하시며 껄껄 웃으시는 걸 보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고립무원이란 말을 이럴 때 써야 하는 것인지 아무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으니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래도 한 순간에 백기투항을 하기에는 아빠로서의 자존심이 걸려있기에 어떻게 하면 피해를 최소화하며 질서 있게 퇴각할까 고심 중이었는데 하필 이 시점에 부모님께서 손녀 얼굴도 볼 겸 잠깐 다녀가시겠다고 하셔서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당장 할아버지 할머니 눈앞에서 감정을 다 드러낼 것이고 손녀에게만은 무한 사랑을 보내주시는 부모님 스타일상 분명 쌈짓돈을 꺼내 딸아이에게 줄 것이 뻔하니 어떻게든 갈등을 빨리 봉합하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일주일 넘는 냉전 끝에 긴 한숨과 함께 도대체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더니 딸아이로부터 단답형 답이 도착했다. 

"프로 2세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부여잡고 결제를 마치고 올해 생일 선물은 없을 거니 그리 알고 있으라 전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목소리로 생일선물 44일 먼저 받는 셈 치겠다고 했다.


일단 결과를 만들어내긴 했지만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데 늘 엇박자 소리만 내는 아내는 미워도 딸 생각하는 것은 아빠뿐이라며 역시 딸바보답다는 해괴한 말을 꺼내놓으며 사람 속을 뒤집어 놓고 이런 내용들을 세세하게 알지 못하는 부모님께서는 늘 이쁜 손녀, 정 많은 며느리라고 좋은 말씀만 시니 당사자인 나는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다 못해 한 줌의 재로 남을 판이다.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부모님으로부터 단 한 번도 선물이란 것을 받아보지 못했고 부모님께 떼를 쓴 적도 없고 내 고집대로 뭔가를 해본 기억도 없다. 자칫 잘못하면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왜 나는 늘 양보를 해야 하고 손해를 보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 가끔은 '본전 생각'이란 게 날 때가 있다.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시원하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지만 그래 봤자 뭐 하겠나 싶은 생각이 든다. 왕비가 사람 구실을 하기 시작하니 공주가 망나니가 되는 이 현실을 어찌 받아들일꼬.





메인사진 출처 : 본인 휴대폰 

촬영장소 : 양귀비가 아름다운 경남 함안 뚝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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