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대라는 상징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그런다고 뭐가 변하냐?" 라는 말이었다. 주제가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에게 이 말 만큼 기운빠지게 하는 말은 없다. 너의 그 행동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아무런 효과도 없으며 즉, 의미없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 말이 진짜 기분이 나쁜 이유는 그 말이 '맞다'는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항변할 수 없는 현실이 내 앞에 있었다. 그 그럼에도 '뭐가 변하냐'는 그 말에 지지않기 위해, 그 말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무의미함'과 싸우기 위해서 지금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빨대는 일종의 상징이야"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내가 남편과 빨대 문제로 엄청나게 싸웠던 이야기를 했을 때였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그때는 더 심각한 '플라스틱 포비아' 에 빠져있을 때여서 나에게 빨대는 상징일 수 없었다. 빨대는 실재였다. 내가 빨대를 쓴다면 빨대는 500년간 썩지 않을 것이고 혹시 바다로 흘러가 바다동물의 코에 찔려 피를 흘리게 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가장 손쉽게 바꾸거나 포기할 수 있는 빨대만큼은 절대 쓰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한 사람이었다.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었지만 그 '타인'과 '나'의 경계에 여전히 불분명하게 세워져있는 남편과 가족이라는 존재에게 나는 늘 무언의 강요를 해 왔던 터였다.
그는 빨대 '하나' '하나' 그 개별적 존재(빨대도 존재라면)에는 사실 큰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러니 그런 걸로 싸우지 말라는 말이었다. 생각해보니 사실 그랬다. 나의 잔소리에 남편은 벌떡 일어나서 카페를 떠나버렸다. 그만큼 그 빨대가 중요했을까. 1.5억톤(2018년 우리나라 쓰레기 배출량*)에서 빨대 하나 줄이는 것이 남편과의 관계를 망가뜨릴만큼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남편과 왜 싸운 것인가. "그런다고 뭐가 변하냐?" 라는 말에 포함된 공격성이 빠져있을 뿐, 실제로는 같은 말이었다. 무의미함. (당시에는 같은 말 처럼 느껴졌다.) 빨대가 의미 없다면 비닐봉지는, 배달용기는, 나의 그 모든 행동에는 '의미'가 있을까? 나의 존재는 빨대만큼이나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출처 : 한국폐기물협회 http://www.kwaste.or.kr/bbs/content.php?co_id=sub0401
내가 반찬통을 들고가서 장을 봐 와서는 짐을 풀어 냉장고에 넣기 전에 '장바구니 샷'을 찍어 블로그에 올리곤 했다. 일단 냉장고에 들어가면 다시 꺼내기가 귀찮으니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사진을 찍는데 그걸 보고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자랑하려고 제로웨이스트 하냐?" 남에게 보여주기 식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지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응원과 동참을 기대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빨대는 상징이다"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과 "자랑하려고 제로웨이스트 한다" 는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인정하는 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나는 결코 무의미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2019년 트럼프 선거 캠프에서 기부금을 모으기 위해 빨대를 만들었다. 새빨간 플라스틱에 트럼프라고 새기고 '빨대를 다시 위대하게(Make straws great again) 진보적인 종이빨대는 필요없다'는 홍보문구를 써서 판매했다.
개당 2천원 꼴로 비쌌지만 대박이 났다. 트럼프는 플라스틱 빨대보다 더 중요한 환경문제가 많다, 집중해야할 다른 것이 있다고 밝혔으나 종이빨대와 친환경적 분위기가 내심 불편했던 사람들을 파고 든 전략이라고 보는 견해가 더 지배적이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너희는 그냥 플라스틱 빨대 쓰고 편안히 살아, 더 중요한 환경 문제는 내가 다 해결할게." 외면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적합한 메세지였을까. 나는 그제야 이 가벼운 빨대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반환경적 상징으로 활용되는 지를 보았다. 같은 '가벼운 빨대'이지만 트럼프(그깟 빨대 따위)와 환경단체(가벼운 빨대부터)는 전혀 다른 메세지를 실어나르고 있었다.
내가 하는 행동 하나 하나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었다. 빨대 하나와 가족의 가치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렇게 살면 나도 가족도 힘만 들 뿐이었다.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노력하다 힘이 들어서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거나, 어쩌다가 사용한 플라스틱에 죄책감을 느끼거나, 남편이나 아이들이 플라스틱을 욕심낸다고 해서 화를 내면 내 삶이 망가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남편과 싸우며 얻어낸 플라스틱 빨대 하나 안 쓴 것 보다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수준을 유지하면서 '자랑'처럼 올리는 블로그 글 하나가 실제로는 더 큰 효과를 가지고 왔을 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빈정대듯 했던 말이 사실은 정답같은 말이었다. 내 '제로웨이스트 장보기'의 진짜 목적은 그 날 아낀 비닐 몇장 이 아니라 '사진찍기'에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제로웨이스트 장보기' 에 도전하고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행동하여 '제로웨이스트 장보기'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 말이다. 빨대 하나 줄이기 위해 가족과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빨대 문화를 없애나가기 위해 애써야 할 일이었다.
'빨대는 상징이다.' 어쩌면 작고 사소한 개인의 상징이다.
그는 내게 빨대 그거 '의미없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었다. 빨대는 참을 수 없이 가볍고 사소하고 일상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중요하다. 정치인 트럼프가 플라스틱 빨대를 뿌리면서까지 갖고 싶던 유권자의 작은 한 표, 기업가 트럼프 판매하는 물건을 사는 한 명 한 명의 소비자들이 '트럼프' 라는 힘의 바탕인 것이다. 그 '중요한'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