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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샬린 Sep 28. 2020

자만에 대해서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는 우리 모두가 무얼 하고 있는가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라는 말에 나와 여러분이 언제나 포함되어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사실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한 부분이다. 우리가 그런 일들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에 상관없이 개인적으로 그런 일들을 ‘믿거나’ 혹은 ‘부정하거나’와 상관없이 말이다. 환경문제제에 대해 옳은 쪽에 서 있다고, 기후변화 문제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해도, 당신이 논쟁을 벌이는 상대 쪽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이 지구를 망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겸손함으로 부드러워진 노력이 고결함으로 무장한 노력보다 우리를 훨씬 더 멀리 데려가 줄 수 있다.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232  호프 자런



  어떤 한 가지에 집중하다보면 다른 것들을 놓쳐버리기 쉽다. 그 한 가지가 아무리 옳은 일이여도 그렇다. 무려 북유럽에서 온 대나무 칫솔을 들고 천연재료 '대나무'라고 좋아했던 일이나 eva 소재 실내화 대신 천으로 된 실내화를 신겼는데 알고보니 eva 보다 천 신발이 탄소발자국이 무려 10배나 높다는 사실, 게다가 면소재가 목화재배와 가공시 물이 엄청나게 사용된다는 것이다. 케익을 카페에서 먹으면 내 눈 앞에는 쓰레기가 하나도 없지만 알고보니 한조각 한조각 포장된 케익을 꺼내 예쁜 접시에 담아준다는 것을 알게 된 적도 있다. 그런 예들은 무수히 많다. 환경과 제로웨이스트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일차원적으로(무조건 노플라스틱) 접근하여서 생긴 문제들도 있지만, 기후위기나, 비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의 생존 문제까지 알면 알 수록 단순해지는 것이 아니라 '복잡하여 풀수 없겠다'는 생각이 강해지곤 한다. 지금 이 환경의 위기는 단순히 사람들의 이기심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복잡한 세상이기 때문에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일회용 플라스틱에 담긴 편의점 '비건도시락'을 보며 내가 '이런 비건 도대체 무슨 의미?' 라고 생각하며 혀를 끌끌 차는 것 처럼 비건들은 아마도 내가 다회용기에 고기를 포장해서 들고 오는 걸 보면 '이런 제로웨이스트 도대체 무슨 의미?' 라고 생각할 것이다. 

  대형마트에서 한 번 장보고 오면 될 일을 차를 타고 전통시장 갔다가, 차를 타고 한살림을 갔다가 하면 탄소배출때문에 환경을 더 망치고 있는 것 아닐까? 비닐봉지는 잔뜩 쓰더라도 전기차를 타는 사람이 있고 텀블러는 안쓰지만 자전거로 출퇴근 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집 화장실 리모델링을 해볼까 고민을 하던 중에 몇년동안 비닐봉지 안쓴다고 노력해도 아파트 리모델링 한번이면 그 쓰레기보다 훨씬 더 많은 쓰레기를 배출해내는 것은 아닌가 싶어 그만 두기도 했다.

  코로나로 인해서 비대면 회의나 수업이 급증해서 탄소배출이 좀 줄었을까 했지만, 우리집 조차도 남편의 재택근무로 인해서 노트북을 샀다. 전자기기의 생산과 폐기와 관련된 중금속 유출로 인한 환경문제나 니켈, 카드뮴 등을 채굴하는 데 관련된 저개발국가의 노동자 인권과 정치적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거기까지는 아직 나의 영역 밖이다. 

  내가 완전 무결한(다른 어떤 문제도 발생시키지 않는) 제로웨이스트를 하기위해 노력하는 것은 허황된 이상주의에 불과할 지 모른다. 애초부터 도시의 아파트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식주를 기대 살고 있는 이 상황 자체가 어느 정도 환경파괴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하얼과 페달처럼 동백숲 작은 집에 들어가 살면 가능할까. 그러면서도 나의 생활을 조금 바꾼 것에 대해 내가 남들보다 잘났다, 우월하다는 자만심을 갖고 살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경험이 있다. 



  카페에 가서 친구가 라떼를 마시려는 상황이었다. 빨대 꽂아주지 말라고 부탁했더니 빨대를 꽂지는 않고 옆에 함께 주셨다. 그런데 친구가 옆에 있는 빨대를 쓰지 않고 ‘포크나오면 저어야겠다’ 하더니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포크로 저어 먹는 것이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나때문에 그런가’ 하는 마음에 뭔가 미안한 마음이 계속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아니라고, 다른 데서 빨대 안쓰려고 집에 까지 들고가서 마셨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나때문에 빨대안쓰는 것으로 착각을 하니 평소에도 빨대 안쓴다는 설명을 내게 굳이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전에도 SNS에 나도 해봐야겠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런 댓글을 보고서도 '그냥 하는 소리겠지..' 했나 보다. 어쩌면 내가 그 친구에게 ‘계기’ 가 되었을 수는 있겠지만, 내 주변 사람들의 친환경적 행동이 나를 의식해서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너무 부끄러웠다.  스스로 선택하여 하는 일 앞에서 나의  ‘미안하다’ 는 그 말은 그 행동의 의미를 축소시키고 그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게 진짜 미안한 일이었다.



  환경운동가들만 환경문제에 관심이 있고 환경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그들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완벽하게 실천하지 않더라도 늘 한 쪽 마음에는 환경에 대한 부채감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현대를 사는 우리들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 중에 하나다. 호프자런의 말 처럼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무엇을 하느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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