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깅의 의미
처음 아이들과 현장학습을 갔을 때 였다. 나는 모두가 자기가 자기 자리만 잘 정리해도 완벽하게 깨끗해 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그것은 환상임이 드러났다. 나는 이 나무젓가락 누구꺼야? 이 과자 누구꺼야? 를 외쳐야만 했다.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아이도 있었겠지만 정말 ‘내 것’인지 모르기도 했다. 나무젓가락은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으니까. 게다가 ‘각자 자기 자리’를 치울라 치면 바람에 날려 온 쓰레기는 내 쓰레기 아니어서 안치우고, 바람에 날려 간 쓰레기 주인은 내 자리가 아니니 모른 척 해버리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자기가 자기 자리’ 치우는 원칙은 얼핏 듣기엔 정의롭지만 그저 환상일 뿐이었다. 나와 너를 가르고 내쓰레기 니쓰레기를 가르는 소모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만 할 뿐이었다.
옆반 선생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먹은 곳은 ‘우리’가 함께 정리해야하므로 너나없이 함께 정리하자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정작 아무데나 버린 친구는 역시나 모른 척 내빼고 평소에 선생님 말을 잘 듣는 (혹은 잘 보이고 싶은) ‘착한’ 친구들만 남아 정리하게 된다. 시간이 걸리는 데다가 줍는 친구들이 뭔가 불공평하다고 느끼게 된다.
또 어떤 선생님은 자기 자리 정리를 마친 후 남은 쓰레기 정리는 ‘모두가 5개씩’ 주워오는 게임의 방식으로 빠르게 끝내는 것을 보기도 한다. 그러면 최소한 아예 안줍고 슬금슬금 피하는 아이들은 없고 누구든 재빠르게 5개를 줍고 놀고 아이에 따라서 그 이상을 주워오기도 한다.
아무데나 버려진 일회용컵이 있다. 아무데나 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은 알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다. 누가 책임져야 할까?
애초에 아무데나 버리지 않도록 하는 두가지 유인책이 있다. 1) 텀블러 사용 시 할인 2) 일회용컵 보증금 제도
비슷한 금전적인 보상이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1) 텀블러 사용시 할인은 발생시키지 않았을 때 약간의 이익을 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 작은 이익을 노리고 텀블러를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환경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불편함을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 약간의 부가적인 이득을 얻는 것 뿐이다.
2) 일회용컵 보증금 제도는 사용할 때 돈을 지불하기 때문에 사용자에게 징벌적인 제도다. 이 제도는 보증금을 걸어두었기 때문에 일회용컵 쓰레기가 발생하더라도 거리에 나뒹굴지 않고 회수되어 재활용 가능성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다. 2002년 자발적 협약의 형태로 존재했지만 2008년에 폐기되었다가 14년 만에 부활하게 된 제도이다. (2022년 6월 시행 예정) 이득(할인)은 포기할 수 있지만 징벌(추가비용)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데다가 이 보증금을 돌려받으려면 일회용컵을 다시 가져다주어야 한다는 불편이 생기기에 애초에 일회용컵을 선택하는 비율을 낮추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버려진다면? 버려진 쓰레기의 주인을 찾아 ‘니 쓰레기 니가 주워’ 같은 보복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환상이다. 그 일을 벌인 사람은 누군지 알 수 없지만 그저 공공의 요금을 들여 치운다. 분리배출된 재활용품을 수거하는 데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재활용품만 분리배출해야 하는데 일반쓰레기가 마구 섞여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골라내고 가는 일은 불가능하므로 비용을 들여 대신 치운다는 것이다. 불공정하고 비합리적인 것 같지만 어쩔 수가 없다.
플로깅이라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이렇게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와 같은 정의를 쫒는 성향의 나이기에 대단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내가 내 노동력과 시간과 심지어 쓰레기봉지 가격까지 들여서 남의 쓰레기를 줍는다니! 버린 사람은 나몰라라 하고 있는데 말이다. 플로깅은 조깅을 하면서 쓰레기를 줍는다는 뜻의 신조어이다. 외국에서는 그렇게 취미생활과 정화활동을 동시에 하는 멋진 일로 여겨진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한발짝 가고 쓰레기 줍고 한발짝 가고 쓰레기를 주워야 해서 조깅은 사라진다는 말도 있기는 하다. 해변 정화활동도 마찬가지다. 쓰맘쓰맘 모임에서 주된 활동이기에 참여는 했지만 사실 처음부터 크게 활동의 의미에 공감을 해온 것은 아니었다. 그런 플로깅이 더 활발하게 일어난다면 여전히 버리는 사람은 무임승차하여 버리고 줍는 사람은 줍는, 임금노동자를 고용하는 상황보다도 더 불공평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쓰레기책>(이동학)을 보니 일본에는 환경미화원이라는 직업이 없다고 한다. 대신 플로깅과 같은 활동을 하는 시민활동이 주가 되어 도시환경을 정화한다고 하는 글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내가 의미없다고 생각했던 플로깅이 사회 전반을 이끌고 있다니 말이다. 애초부터 내가 갖고 있던 ‘자기 쓰레기 자기가 치운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공공의 힘을 빌려 치울 수 밖에 없는데 우리나라는 임금노동자가, 일본은 자발적 시민단체가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옆반선생님께서 사용하셨던 ‘집단적 책임지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 단체에 속해 일을 지속하다보면 일단 힘들기 때문에 쓰레기를 버리면 내일아침 어디로 슝하고 마법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노동력에 기대서 처리되어야 함을 깨달을 수 있다.
게다가 이 일이 시민의 책임임을 깨닫는 순간 ‘몰래 버리는 짓’의 부도덕함에 대해서 훨씬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 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에서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누군가 슬쩍 버리더라도 꼴불견일 수는 있지만 뭐 그럴수도 있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반면에 일본에서는 버리는 일 자체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나쁜 행위로 인식될 가능성이 있고 결국 버리지 않고 집에 가져가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또한 결국 그렇게 집으로 자꾸 가져가다보면 쓰레기가 많음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줄이려는 노력’도 생기게 될 것이다. 플로깅에 관심이 없었던 이유는 내 관심이 쓰레기 ‘발생’에 있지(발생을 안시키겠어) 쓰레기 ‘처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길에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는 어차피 발생된 쓰레기이기에 위치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나의 짧은 생각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일은 ‘위치’ 만의 문제거나 한 개인의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비록 나쁜 행동이지만 눈쌀을 찌푸리며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공동체의 문제로 인식하여 끌어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시민활동이다. 더 이상 플로깅’이라는 활동의 의미를 축소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앞으로 더 많은 쓰레기 줍기 행사가 일어나고 그리하여 쓰레기가 모두의 책임임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