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빠의 급 반성문
엄마는 요리를 참 잘한다. 나름 다양한 재주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빠가 질투를 느낄 정도. 웬만한 한식류는 대충 감으로 해도 내가 온 정성을 들인 것보다 낫다. 엄마가 말하는 아빠의 요리는 ‘지나치게 창의적이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던가..
엄마는 요리하는 걸 싫어한다. 아니 귀찮아한다는 게 더 맞겠다. 특히 육아를 시작한 뒤로는 더더욱. 칼질은 원래 하는 걸 싫어했고 사정이 사정인만큼 요리란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30분, 한 시간씩 부엌에서 뭔가를 한다는 게 말이 쉽지 진짜 어렵다. 설거지 젖병 닦을 시간과 체력도 부족한데 요리라니. 그래서 아빠는 VIP가 됐다. 배달의민족 VIP. 포인트 추가 적립되는 신용카드까지 만들었다. 요즘도 아빠는 오후 4시만 되면 엄마에게 기계처럼 묻는다. “저녁 뭐 먹지?”라고 쓰지만 사실은 “뭐 시켜먹지”에 가까운 질문이다.
그런데 엄마가 요즘은 요리를 한다. 우리가 쓰던 두툼한 식칼 대신 조그마한 과도를 들고 요것 저것 썰어대고, 데치고, 굽는다. 아빠 담당이었던 마켓컬리, 쿠팡에서 장도 본다.(물론 포인트 적립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디는 아빠 것을 사용한다) 아빠보다 몇 배는 섬세한 초이스. 그럴 만도 한 게, 전부 아기가 먹을 것이기 때문.
아직 이도 나지 않았는데 아기는 죽 형태의 후기 이유식도 재미없어한다. 매일처럼 앉아서 냠냠 쩝쩝 맛있게 식사를 하는 엄마 아빠를 지켜봤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음식도 음식이지만 엄마가 떠먹여주는 것도 가끔 거부한다. 자기가 집어서, 자기 입으로 넣고, 쟙쟙쟙 소리를 내면서 먹고 싶어 한다.
엄마가 요리조리 다듬어서 데쳐서 내어준 방울양배추, 브로콜리, 두부를 야무지게 쥐어 먹는다(고 전해졌다.. 아빠는 회사에 있었으니 알 길이 없다). 물론 흘린 게 절반 이상이지만, 그래도 엄마가 보내주는 사진과 영상을 보면 신나는 모양. 하지만 엄마는 마냥 신날 수만은 없다. 여기저기 흩뿌려진 브로콜리 때문만은 아니다. 서툰 칼질과 불 다루기에 손을 데이기도 하고, 과도로 듬성듬성 자르다 보니 손을 베일 뻔하기도 했단다. 핑거푸드 만들다 핑거를...썩은개그
사실 분유만 먹던 시절 아빠는 나름 자부심이 있었다. 아기의 먹는 습관과 패턴은 어떠한지, 어떤 자세로 어떤 각도로 아기에게 젖병을 물려야 하는지, 분유는 어떻게 타야 잘 녹는지 온도는 어떤지 등등.. 웬만한 엄마들 못지않게 잘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이 있었다. 실제로도 그랬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 그래, 이유식을 시작할 때부터였다. 아기의 식생활은 점점 엄마만의 일이 됐다. 이유식 브랜드를 고르고, 주문을 하고, 어떤 것을 얼마나 먹일지 선택하고, 텀은 어떠하며 분유 보충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빠는 전혀 팔로잉하지 못했다.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분유를 먹일 때의 자신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매번 “무엇을 언제 얼마나 먹여야 하는지”를 엄마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엄마가 없을 때 아빠 혼자 이유식을 먹여야 할 때면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핑거푸드는 더더욱 그렇다. 엄마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수행했다. 아빠는 양배추 하나 데쳐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이제는 겁이 날 정도다. 슬프다. 아니 반성하면서도 잘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엄마는 아기에게 가장 중요한 의, 식, 주(잠?)를 모두 전담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함께 하는 육아를 하자고 마음먹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엄마에게 많은 것을 미뤄온 것은 아닐까. 회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도피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에 이르자 민망하고 미안해진다.
하루하루는 너무 길지만 10개월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하루하루를 조금 더 소중히 여기자. 엄마의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자. 적어도 불평과 넋두리를 은근슬쩍 무시하거나 비루한 것으로 치부하지는 말자, 라는 생각이 드는 10개월의 어떤 주말 밤. (이라고 쓰면서 또 반성이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