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중 Apr 23. 2020

코로나19 배제당한 한의사, 우리도 의료인이다

월간에세이 4월

오랜만에 지소 맞은편 초등학교에서 아이들 노는 소리가 시끄럽다. 이 시끄러운 소리가 반가워지는 날이 오다니. 국내 첫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한 후 벌써 석 달. 익숙하던 것이 낯설어지고, 불편하던 것이 그리워졌다. 아직 공식적으로 개학을 한 것은 아니라고 하니 아마 선생님들이 아이들이 놀 수 있게 학교 운동장을 오늘만 개방해준 모양이다. 아이들의 신난 목소리를 보니 정부에서 사회적 거리두기 권고의 강도를 조금 완화한다고 발표한 덕을 본 셈이다. 아직 완전한 종식까지는 까마득한 시간이 남은 것을 알지만, 새삼스럽게 하루빨리 소중한 일상이 다시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라본다.


한국의 코로나19 대응은 전 세계의 모범이 되고 있다. 정부는 그 공을 국민들의 자발적인 협조와 의료진들의 희생정신에 돌렸다. 우리 한의사들은 엄연히 의료인이고, 감염병의 진단, 보고의 의무가 있는 방역의 주체이다. 하지만 의료진들의 희생정신 얘기가 나올 때마다 왠지 내 얘기는 아닌 것 같은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한의계는 정부와 지자체에 의해 철저하게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2월 19일 급하게 대구지역 차출 공보의를 선정해달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나를 포함한 많은 한의과 공보의들이 자원했다. 2주간의 격무, 이후 2주간의 자가격리. 무엇보다 감염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주변의 만류와 스스로의 걱정을 뿌리치고 의료인으로서 사명을 다하자는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명단을 제출한 지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차출 대상은 ‘의과’ 공보의로 한정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의사는 검체 채취를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감염병 예방법의 시행규칙상 감염병 환자의 진단, 신고의 의무가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대한 공중보건 한의사 협회(이하 대공한협)는 성명서를 내고 담당 공무원들에게 전화로 항의를 하고 언론에 우리의 상황을 알려가며 싸워나갔다. 그리고 2월 29일 드디어 권준욱 질본 중대본 부본부장의 입에서 “치의사, 한의사 등 직역 무관 모든 의료자원 수용하겠다”는 발표가 나왔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한의사를 방역의 주체로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3월 초 자원자 명단을 다시 한번 복지부에 제출했을 때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대구경북 지역은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의료인의 수급이 시급했지만, 보건복지부, 대구시, 경북도 모두로부터 의사와 한의사의 직역 갈등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큰 각오를 하고 선의로 봉사를 결심했던 한의사들은 허무함과 무기력함 속에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혹자는 가기 싫은데 억지로 끌려가는 것보다는 안 가면 속 편하고 좋은 것 아니냐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공한협 정책이사로서 이번 일을 치르다 보니 그런 생각보다는 억울함과 무력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가장 논쟁이 되는 부분은 한의사의 검체 채취 가능 여부였다. 검체 채취 행위는 ‘한방 의료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법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한의사의 감염병 진단은 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닌 의무이다. 이는 법에 명시된 부분이다. 현 대공한협 회장, 부회장, 법제이사를 비롯 전국의 여러 한의사들이 이번 코로나 19 정국에서 검체 채취를 하며 근무한 경력이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데 유독 대구, 경북 지역에서는 문제가 생긴다는 걸까?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파견 문제는 3월 7일 신규 의과 공보의들의 긴급 투입으로 사실상 일단락되었다. 이제는 지난 일을 복기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 허무함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성과가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한의사가 검체 채취 업무에 동원된 첫 사례를 남겼다. 의, 치, 한 직역 상관없이 모두 동원하겠다는 정부 기관인 질본의 공식 입장으로서 발표하게 만들었다. 한국 제도 내에서 한의사가 불합리하게 차별, 배제되고 있다는 현실을 국민들에게 조금이나마 알렸다. 전염병 시국에서 활용할 수 있는 한의진료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의제를 던져 이슈화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한의협이 진행한 무료 비대면 의료봉사에서 전체 확진자의 10%가량이 한약을 복용했고 만족도 또한 매우 높았던 것으로 집계됐다. 당초 목표가 아니더라도 지금의 이런 성과들은 분명히 한의계 발전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과제도 분명하다. 전염병은 앞으로도 몇 년에 한 번씩 인류를 덮칠 것이다. 이번에 쌓아놓은 좋은 선례들을 근거로 또다시 감염병이 유행할 때 조금씩이나마 우리의 역할을 늘려나가야 한다. 적어도 일반의 혹은 간호사가 하는 간단한 술기들은 법을 핑계로 한의사가 못하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더불어 방역 시국에서 한방 치료를 병행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을 요구해야 한다. 이번에 한약을 처방받은 확진자들의 사례를 들어 한약이 바이러스 감염병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점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공중보건의로서 한의사도 예방접종, 건강교육, 건강검진 등 공공의료 부문에서도 역할을 넓혀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부의 입장에서 필요할 때는 한의과 공보의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는 좋은 선례를 계속 계속 남겨야 한다.


 물론 귀찮은 일이다. 하지만 해야 한다. 한의사는 6년, 혹은 그 이상의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전문가들이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들에 막혀 우리가 배운 것들을 세상에 펼쳐보지도 못해서는 안된다. 새로운 법을 만들어 내자는 얘기도 아니다.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우리의 권리와 책임을 부정당하는 현실을 바꾸자는 이야기다. 한의사들이 의료인으로서 온당한 지위와 권한을 회복하는 날을 꿈 꾼다. 그 날을 위해 대공한협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리라고 약속한다.


끝으로 이 글을 빌려 흔쾌히 코로나 파견 업무에 자원해준 여러 한의사 선생님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

여러분이 진정한 영웅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10킬로의 벽을 넘어라 120킬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