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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남우 Nov 11. 2022

선 넘는 여자, 선 지키는 남자

지킬 선은 지켰어야지

“아놔… 또 이렇게 주차해놨네”


주차선을 물고 비뚤게 주차되어 있는 흰색 렉서스 앞에서 난 정수리가 폭발할듯한 짜증을 느끼고 있었다. 지난달에 승진하면서 회사 주차장에 내 전용 주차공간이 생겼다는 기쁨은 잠시. 내 주차공간 옆에는 저 흰색 렉서스가 항상 내 공간을 침범하며 주차되어 있었다. 저 차를 피해 좁은 공간에 우겨 주차를 하다 보니, 난 늘 끼여 나오듯 간신히 차에서 내리거나 심지어 뒷트렁크로 내려야 했다.  난 포스트잇을 꺼내 짜증을 담은 메시지를 그 차 앞유리에 붙여 놓았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좀 넘지 맙시다]


내 분노의 크기에 비하면 정말 톤을 누그러뜨려 점잖게 남긴 메모였다. 차 주인이 이 건물에서 늘 마주치는 사람일지도 모르고 지정주차구역을 이용하는 걸 보면 꽤나 높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싶었다. 그래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 메모를 읽고서 주의를 하리라 기대했다. 


“아 미친… 아주 창조적인 주차를 하셨네.”


다음날 아침, 뒷바퀴가 주차 턱에 올라간 채로 선을 넘겨 주차된 차 앞에서 난 헛웃음이 나왔다. 내 메모에 대놓고 반항이라도 하는 듯한 광경에 내 참을성의 끈이 툭 끊겼다. 난 분노를 그대로 끌어올려 짜증 섞인 메모를 앞유리에 붙였다.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서. 어떻게 얻어낸 내 전용 주차공간인데 이렇게 매일 불편하게 살 수는 없었다.   


[선 넘는 게 취미세요?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면 좋나 봐요?]


한동안 외근업무로 오랜만에 사무실에 나온 어느 날, 난 오랜만에 보는 흰색 렉서스를 마주하고 깜짝 놀랐다. 주차선을 따라 마치 자로 잰 듯 반듯하고 좌우 균등하게 주차되어 있었다. 난 그 차 앞에 서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사람은 만만하게 말하면 듣는 척도 안 하고 세게 말해야 알아듣는다. 그 차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차의 문이 벌컥 열렸다. 난 깜짝 놀라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 저, 저번에 메모 남기셨던 분이지요?"

차에서 내린 여자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연신 그동안 미안했다며 사과를 했다. 얼마나 열심히 고개를 숙이는지 검은 긴 생머리가 고개를 꾸벅일 때마다 어깨 위에서 파도처럼 찰랑거렸다. 예상 못한 격한 사과에 난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어버버 거리며 손사래를 쳤다. 내 차를 박은 것도 아니고 주차선 좀 넘었던 것뿐인데 이렇게 까지 미안해할 일인가 싶어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녀의 과장스런 사과 앞에 비꼬듯 남긴 두 번째 메모가 후회스러웠다. 

"저 때문에 그동안 주차를 못하신 날도 있으실 텐데... 주차비라고 생각하시고 받아주세요,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녀는 청바지 뒷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흰 봉투를 꺼내 내게 두 손으로 건넸다. 난 손사래를 치며 봉투를 거절했다. 내가 외근 가느라 그동안 며칠 주차를 하지 않았던걸 본인 때문에 그런 줄 오해한 듯했다. 이 사과를 하기 위해 그녀는 며칠간 차 안에서 나를 기다린 듯했다. 내 거절에도 그녀는 완강하게 봉투를 내게 밀었고 나는 정 그러면 돈 대신 밥이나 한번 사달라며 그녀의 봉투를 렉서스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를 저녁에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회사 앞 선술집 바에 나란히 앉아 생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시켜놓고 서로 어색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그동안 미안했다는 사과와 괜찮다는 배려를 서둘러 마무리하고 나니, 직장인들끼리 공통의 대화거리는 역시 회사 이야기밖에 없었다. 그녀가 일하는 게임회사는 한 달 전에 이 건물 7층으로 사무실을 옮겨왔다고 했다. 어쩐지 요즘 건물에 캐주얼 복장으로 출근하는 젊은 사람들이 늘었다 싶었는데 그 때문이었구나. 그녀 또한 흰 티에 청바지 차림으로 이 건물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직장인들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제가 아마 그 회사에 문짝 하나 정도는 기여했을걸요?"

그녀가 다니는 게임회사가 만든 게임에 난 한동안 중독되다시피 한 적이 있었다. 아이템 구입으로 쓴 돈만 못해도 삼백만 원은 넘을 테니 문짝 하나가 아니라 컴퓨터 한 대는 내가 산거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그녀와 난 게임 이야기로 어색함을 극복하고 편하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서로의 게임 캐릭터와 보여주고 현질 경험을 나누면서 한두 잔씩 늘어가는 빈 생맥주 잔과 함께 서로 급속히 가까워졌다. 

처음 만난 사람과 이렇게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경험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녀는 주차매너와는 달리 매우 배려 깊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내 이야기를 눈을 맞추며 끝까지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고, 내 미천한 농담에 격하게 리액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선술집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떠들썩함이 커져갈수록, 우리는 서로의 말 한마디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눈과 입과 귀를 가까이 당겨갔다. 그녀와 나의 무릎이 닿는 횟수가 늘어갔다. 우리가 주종을 생맥주에서 사케로 바꾸었을 즈음부터는 팔꿈치마저 서로 기대고 있었다. 

우리는 다섯 시간 만에 가게에서 나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비틀대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득해져 가는 취기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의 신호를 세심하게 알아채고 있었다. 그녀는 게임하느라 팔에 근육이 생기신 것 같다며  내 팔을 쓰다듬었고, 난 모니터를 가까이 보시느라 어깨가 굳은 것 같다며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었다. 그녀가 주차를 비뚤게 하는 것이 사이드미러가 비뚤어서 그런 것 같다고 하자, 그녀는 내가 한번 차를 봐달라고 부탁을 했다. 난 사이드 미러뿐 아니라 백미러도 봐주겠다며 그녀를 주차장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그녀와 난 모두가 퇴근해서 컴컴한 주차장에서 더할 나위 없이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그녀의 차 뒷좌석은 그녀의 긴 다리를 다 품기에 비좁았지만 난 능숙하게 그녀의 청바지를 내렸고, 그녀 또한 내 와이셔츠 단추 하나 떨어지지 않는 섬세함으로 내 상체를 벗겨냈다. 우리가 어둠과 술과 분위기에 취해 몸을 섞는 한 시간 동안, 그 넓은 주차장에 그녀의 흰색 렉서스와 내 검은 그랜저만이 나란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선 지키는 것 좋아하시는 분이 선을 잘 넘으시네요?"

좌석 아래에서 간신히 찾은 브래지어를 입으며 그녀는 내게 비꼬듯 물었다. 난 땀에 젖은 그녀 다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문득 그녀가 왜 그렇게 주차를 이상하게 했는지 궁금해졌다. 원래 주차를 잘 못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랬던 건지 궁금했다. 나의 질문에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여기 1층 어린이집에 애를 데려다주고 출근해야 해서, 급하게 주차하느라 그랬어요. 이제 애아빠 회사에도 어린이집이 생겨서 괜찮아요."

그제야 조수석을 차지하고 있는 어린이 카시트가 눈에 들어왔다. 방금까지 우리의 몸에서 뿜어낸 열기에 흐려진 유리창이 무색하게 내 등골이 서늘해졌다.

난 정말 선을 넘어버리고 말았다. 주차선 따위의 얇고 하찮은 선이 아닌 굵고 짙은 그 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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