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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필년 Apr 08. 2023

시대에 호응하는 사나이 되기

2023 한국남자, 어디로 가야 하는가

1.

한창 혈기가 왕성할 때의 남자를 '사나이'라고 이른다. 주식을 밥에서 고기로 교체한 덕인지, 매일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애플워치 링을 빠짐없이 채우는 덕인지 스테미나 가 솟구치는 요즘이다. 혹시 관악산 등산로에서 눈빛만 번뜩이는 산짐승과 조우 해보셨나요? 심신 바깥으로 흐르는 기운이 강하긴 강한지...한밤중 야산에서 들개를 만나면 들개가 먼저 도망간다. 들개와 조우해도 내가 더 강하다는 확신이 든다.


그렇다. '사나이力'이 그럭저럭 오르고 있는 것이다. 뜻하던 바다. 퇴사하고 드높이고 싶은 능력 중 하나가 '사나이力'이다. 그렇다면 사나이력이란 무엇인가...타자에게 수컷을 수컷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지배력이라 말해두고 싶다.


타자에게 수컷으로 인식되면

1)고신뢰 고매력의 종족개체로 인식될 확률↑

2)타인에게 함부로 지배(농락)당할 확률↓

3)사회에서 우호와 존중를 얻을 가능성 ↑


정도의 효과를 얻을 수 있겠다. 수컷으로 태어나 사나이력을 평균 이하로 떨구면, 종족번식과 사회적 지위향상 모두 불리하게 작용한다. 심지어 자존감도 훼손된다. 경험상 수컷은 종 전체에서 평균 이상의 개체이길 소망하는 편임. 호모 사피엔스종의 수컷을 이해하고 싶다면 이 무조건적으로 발휘되는 욕망을 먼저 캐치하는 게 좋을 것.


2.

나는 기골이 장대한 편이다. 외적으로 타고난 '사나이力'에서만큼은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고, 이걸 적극적으로 써먹는 편이다. 이는 골치 아프게 구는 중노년 남성을 제압하는 상황에서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최근 생활반경 인근에서 일어난 실화다. 노망이 났는지 오밤 중에 주방용 프라이팬을 두들기는 이웃집 할배의 집이 입주세대 공통의 골치거리였는데...요즘 평균 하우스체류시간이 늘어나니 문제를 크게 실감하게 됐다. 우리집 모친도, 동대표 아재도, 윗집 할매도 처리 못한 빌런영감님을 제압한 게 나다.


영화 <이웃 사람>의 마동석처럼 문을 쾅쾅 두들기고, 결국 두들겨 패서 제압한 건 아니지만.


일단 경험상 대한민국 중노년 남성은 자신보다 체격이 큰 젊은 남성의 말을 제법 잘 따르는 경향이 있고, 대화를 시도하며 경청의 자세를 보이면 생각보다 고분고분해지는 편이다. 초인종을 눌러 이웃집 영감님을 대문 밖으로 끄집어내니,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느니...밤마다 윗집에서 소란을 피워서 나도 맞불을 놓은 것 뿐이라느니(흥칫뿡...윗집에는 무릎이 아파 오래 걷지도 못하는 70대 할매 혼자 사시는데요) 엉터리 변명을 늘어놓는데...


나는 영감님께 악수를 청한 손을 꼬오오옥(꽈아악)잡고 아이구...그러셨군요...그런데요 선생님...선생님께서 이렇게 밤낮으로 쇳덩이 뚜들기시면 저도 선생님만큼 화가 많이 나요...제가 선생님이 내는 소음 때문에 이력서를 못쓰고 취업을 못하게 되면 정말 화가 많이 나겠죠? 그랬구나...윗집에서 소음이 계속 나는구나...선생님 제가 윗집에서 소음이 나는 걸 꼭 처리해드릴게요. 그 대신 저랑 약속 하나 해요... 앞으로 소음내지 않기...네네...선생님 정말 많이 힘드셨겠어요. 네네...근데 제가 그렇다고 선생님이 내는 소음 때문에 똑같이 해드리진 않잖아요. 네네 ...아셨죠? 저랑 엄지손가락 걸고 약속하신겁니다.


최대한 상체를 우람하게 벌려 위압적인 자세를 취하고 웃는 낯으로 10분 간의 대화를 펼친 것으로 세대간 소음문제는 해소됐다.약 보름 정도 지난 지금까지는 말이다.


3.

강약약강의 습성을 지닌 중노년 남성이라지만, 늘 예외도 있다. 지하철 타면 드물게 조우한다. 어느날 지하철 안에서 벌어진 일이다. 나는 닫히는 열차문을 비집고 들어온 중년 남성과 같은 칸에 탑승했다. 아재의 몸은 스크린도어를 간발의 차로 빗겨나갔으니, 아마 몸이 으깨지는 기분이었을 게다. 공중도덕에 어긋나는 일이니 일반적으로 머쓱해하며 다른 칸으로 자리를 옮기는데...이 남자...화가 많이났다. 열차비상무전기에 손을 대더니 기관사를 향해 마구 욕설을 시작한다. 무리한 열차탑승으로 운행이 지연되는 것보다 열차문에 몸을 구긴 아픔이 더 서러운 걸까.


보통 한바탕 욕하고 잠잠해지고 상황종료였는데...이번 빌런은 역대급이다. 무전을 끊고 같은 칸에 있는 승객들에게 눈을 부라리며 위협을 가하는 게 아닌가. "쒸빨럼들아~~뭘 쳐다봐!!!"


이번 지하철 광인을 대하는 호적수는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으나...여러 사람의 대응방식은 나를 이 글을 쓰게 만들었음.


3-2.

이럴 때 맞불을 놓으며 눈에서 레이저를 발사하는 건 대체로 나의 몫이었다. 위에서 언급했듯, 강약약강의 중노년남성을 효과적으로 제압한 이력이 많기 때문이다. "아저씨 지하철 혼자 타셨습니까? 억지로 타서 소란피워놓고 왜 다른 사람들한테 난리피웁니까?"라고 호통을 치니 도리어 내 곁으로 다가와 "왜??? 내가 쒸이이발 이러면 안돼??? 왜 안되는데??? 설명좀 해봐!!!"라고 위협적으로 나서니...와 정말 이거 어쩌면 내가 목적지에 내릴 때까지 해결이 안되겠구나...싶은 거다. 혹시 뉴스에서 봤던 것처럼 홧김에 흉기난사한 광인한테 휘말려서 사고나는 거 아닌가...싶어어서 심박수도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선빵을 먼저 갈겨야 하나...먼저 맞고 뒤지게 패야하나 싶은 생각이 들정도로 격정적인 대치상태가 이어졌다.


내 오른 편에 앉아계시던 여사님이 "학생...저런 사람 상대하는 거 아니예요. 내릴 때까지 꾹 참아요."라고 다독여주시지 않으셨으면...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내 목적지가 광인의 목적지보다 앞섰기에 그 이후의 상황은 다른 승객들의 몫으로 남았다.


"내게 진짜 광기를 다룰 만큼의 힘은 아직 없는 건가..." 싶어서 하차 후 등산로에서 오랜 고민을 이어갔다. 공공장소에서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떤 처세가 올바른 대응인가.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서 끝을 보는 게 더 나은 것인가. 혹은 반대인가.


3-3.

역대급 지하철 광인을 대하는 호적수는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으나, 그들의 대응방식은 모두 훌륭하진 않았다. 특히 가장 멀리서 구경만 하고 있다가 내릴 때가 되서 "아저씨 정말 미친 사람 같아요!!!"라고 소리치며 열차문이 닫히는 순간 밖으로 도망간 20대 청년의 방식이 제일 씁쓸했다. 잔소리 할 호연지기가 있으면, 내 옆에 와서 거들지...


탑승칸에서 벌어진 무례한 이웃의 민폐는 나와 무관하다는 태도로 머무르다...물리적인 안전이 보장되는 상황을 확보하고 나서야 문제제기를 하는 졸렬함이...나는 지하철 빌런의 광기만큼 싫었다.


는 것을 이 자리에 기록해본다.


4.

위와 같은 에피소드를 털어놓는 이유는 개인이 획득한  '사나이力'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생각보다 강력하다는 걸 힘주어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물리적 폭력을 통제하는 개인의 체험은 훗날 정체성에 커다란 파문을 미침.


내가 누구한테 쪽을 못쓰는지...혹은 누구한테 지배력을 행사하는지...sex와 gender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겠어요? 특히 korean male은 한 번쯤은 탐구해야 한다고 봐.  개인이 나름 방향성을 갖춰 가다듬은 종족특성이 포켓몬 배틀 상성마냥 맞물리기 때문.


5.

식단/신체활동 관리는 생물학적인 남성성을 드높이며 인풋과 아웃풋이 정비례한다. 노력한만큼 정직하게 향상된다. 문제는 사회규범으로서의 남성성인데, 이건 사회분위기와 특히 개인이 정체성을 구성하는 방식(내지는 관습적 패턴)에 달려있음.


"우연히 한국사회에서 자라난 개인으로서 나는 어떤 수컷으로 생활할 것인가"

이것이야 말로 요즘 제일 열심히 탐구하는 주제이자, 동료 수컷들과 열심히 잠정결론을 내보고 싶은 주제임.


상남자 하남자 구분지어놓고 낄낄대며 웃는 2020년대. 이는 역설적으로 사나이로 태어나 사나이다움에 대해 고민하는 세상의 유머코드라고 생각함. 한국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으며, 이 시대가 요청하는 남성상은 이전보다 세분화 되고 있다. 특히 남성 주체가 본인이 소망하는 남성상을 쟁취하기가 지극히 어려워지고 있음. 어중간한 캐릭터로는 원하는 욕망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내 오랜 생각이다.


사회학적 통계연구에서도 이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나? 가부장제 사회의 핵심의례인 결혼을 달성하는 게 요즘 10명 중 2~3명이라는데... 2~3명의 남성이 갖춘 성격과 미덕이 있잖아요. 그 교집합 아는 사람들은 뭔지 감 잡잖아요. 특히 한국사회에 태어나 군복무까지 마친 수컷들은 그게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5-2.

죽을 힘을 다해 빚까지 져가며 사회가 미덕이라 말하는 남성상에 헌신하거나...혹은 탈락하거나...음... 나는 그 사이에 3의 길은 없는 건가...좀 궁금하네...ㅎ


아무튼...나는 겉만 수컷스럽지...전반적인 행동은 전통적인 남성상과는 많이 다른 미덕을 갖추고 사는 편이라 고전적인 수컷보다는 좀 다르게 살아야지 싶음. 이는 고명딸 외동아들 아끼는 유부남친구들과, 게이친구들과, 연애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로맨티스트 모두와 함께 고민해볼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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