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없이 두 눈으로 응시한 것만 따로 재현하기
1.
부산으로 출장을 떠났다. 제일 좋았던 모먼트는 부산 전포동 언덕길에서 아침 산책. 돼지국밥 한 그릇 대충 때우고 걷는다. 전포동은 숙소이자 부산 제일 번화가 서면과 가깝다. 우선 자연지리적으로 독특하다. 부산 앞바다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황령산이 우뚝 서있다. 재개발을 마친 고급아파트가 가파른 언덕비탈길에 늘어서있다. 부산역 앞 산복도로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지하상가가 크게 날 정도로 평평한 서면이 급격한 언덕을 만나는 길목 사이에 전포동이 있다.
스몰브랜드가 잔뜩 모인 전포동 골목상점가는 하방할 수록 완만한 평지로 둔갑하는 지점이라 걷는 맛이 쏠쏠한 동네다. 전날 술마시러 택시타면서 부산도로의 무지막지한 경사도를 느꼈던지라, 이 흥미진진한 언덕을 조금 더 걷고 싶었다. 걷지 않으면 모르고 넘어갈 게 많을 거 같았어.
광복절 아침을 맞이한 전포동은 무척 조용했다. 문을 연 가게는 편의점 뿐이었고, 폐업한 가게 인테리어 설비를 철수하는 용역 패밀리 밖에 없었다. 이곳엔 하이볼바나 양고기구이집처럼 컨셉 레스토랑이 많았다. 오래된 공구상가 같은 곳에 힙한 업장이 들어서는 건 서울과 똑같지만.. 자본의 냄새가 덜하다고 해야할까. 미적 감수성이 좀 구리다 싶은 건 있어도 가게사장님이 다 자기 ㅈ대로 장사하는 곳이란 느낌이 팍팍 들어서 좋았다.
'약간 어설퍼도, 내가 생각하는 멋은 이거야.' 라는 느낌을 팍팍 내는 괴상한 레스토랑이 잔뜩있었음. 그래서 한국 동시대 1타 힙플레이스 성수동보다 전포동이 마음에 드는건가. 조용한 번화가를 걸으며 가끔 영업준비를 하다 기지개를 켜며 담배를 피는 가게종업원 얼굴을 볼 따름이다. 조금 애를 써야 볼 수 있는 어느 거리의 풍경은 모두 우연이다. 우연이기 때문에 순간적이고. 그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특별하다. 걸으면 걸을수록 특별한 감흥이 몽글몽글 샘솟는다.
2.
모먼트의 절정은 '히떼 로스터리'를 탐색하는 것이었다. 같은 매체에서 기고중인 커피 컬럼니스트분이 부산 스페셜티 커피를 리스트클로 묶었던 걸 기억해냈다. 작가님은 언젠가 내게 "모름지기 카페는 아침에 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말씀에 따르면 '히떼 로스터리가'전포동에서 유일하게 장사를 시작한 가게였을 것. 커피 로스터리 투어는 이번 부산 출장의 소소한 목표이기도 했고, 일단 모닝커피 넘 절실해. 맛있는 모닝커피를 꼭 마실거야...
문제는 핸드폰 배터리. 간밤에 충전 핀에서 빠졌는지 충전량이 모자라긴 했는데, 카페 찾아가는 길에 꺼질줄이야. 인근 가게에 묻고 또 물어서 가게를 무사히 찾아갔다.
아니 근데 이게 무슨 일인지. 가게 위치는 상권 끝자락 비탈진 언덕길. 차로 옆 주택건물 2층을 개조한 작은 카페였다. 입구계단부터 하얀 벽돌색과 잘 어울리는 식물이 손님을 반겼다. 식물을 낀 가게입구 풍경엔 두 가지 아름다움이 있었다. 하나는 산을 병풍처럼 낀 부산 시내의 원거리 풍경. 두번째는 카페 맞은 편 주택의 근거리 풍경. 맑은 볕을 쬐고 뽀송뽀송하게 마르고 있는 빨래와 옥상에 깔린 초록색 페인트와 (대체 왜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여튼 자연스러운) 칠성사이다 빠께쓰와 마시자~코카콜라 빠께쓰가 보였다. 아무리 봐도 젊은 사람은 아닐 거 같고, 할매요~할배요~ 소리 들을 거 같은 분들이 사는 작은 가정집과 오래된 골목길이 잘 보였다.
이 모든 풍경은 가게 안 1석, 가게 밖 1석에서 커다란 통창을 경유하면 기분좋게 감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필 배터리가 나가서 이 모든 풍경은 핸드폰에 따로 기록되지 못했다.
3.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시간은 오전 10시. 커다란 유리를 바둑판처럼 나눈 격자모양 통창에 햇볕이 쏟아진다. 대낮에도 실내조명을 따로 켜놓는 카페인 탓일까. 인공광과 대비대는 자연광이 인상깊은 띠를 만든다. 15분쯤 구경했을까. 손님이 없는 카페에서, 사장님조차 조용한 카페에서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빛의 띠를 자꾸만 바라봤다.
사람은 왜 빛을 보면 홀린듯 황홀해할까? 이 기분은 수년 전 나주 폐양조장 견학갔을 때 느낀 쾌감과 비슷하다. 창틈 사이로 쏟아지는 햇볕이 건물 안 오래된 벽지와 집기를 비출 때, 말로 다 담기 힘든 아름다움을 느꼈다. 사람은 누구나 둘도 없는 하나를 좋아한다. 오래된 확신이다. 유일무이한 곳의 유일무이한 순간은 당연히 좋다. 이 세상의 둘도 없는 것. 사랑합니다. 그런 게 인생에 1분 1초라도 많이 곁에 있는 게 좋다. 자연에서 온 빛은 유일무이한 것을 포착하게 돕는다.
이 모든 풍경은 가게 어디서든 아주 잘 관찰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필 배터리가 나가서 이 모든 풍경은 핸드폰에 따로 기록되지 못했다.
4.
다시 숙소로 돌아와 보조 배터리를 끼고 나머지 일정을 수행한다. 평소처럼 열심히 찍었고 타인과 나누고 싶은 건 인스스에도 올렸다. 하지만 그 순간들은 베스트가 아니다. 설령 내가 전포동 산책길을 온전히 카메라에 담았다 한들 그게 베스트 기록일까? 히떼 로스터리 계단을 오르며 봤던 가드닝과 부산풍경, 카페 안에서 관찰한 창가의 빛은 내가 감각한 것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광각으로 찍건 파노라마로 찍건 그건 나의 베스트가 아니었다. 찍었던 사진을 지금 남긴 묘사에 포갠다고 해도 베스트가 아닐 것이다.
5.
진짜로 좋았던 건 제대로 전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그런 걸 열심히 전해야하는 팔자. 나는 오늘도 망했다. 진짜로 좋았던 것을 제대로 묘사하고 기로하려는 시도는 오늘도 망한 거 같다. 이 기록에 남길 사진은 없다. 글도 딱히 쓸모있거나 예쁘진 않은 거 같다. 하지만 태도는 남길 수 있다.
진짜로 좋았던 건 타인에게 제대로 전하고 싶다.
그게 나를 살리기도 할 것이다.
이 마음씀씀이를 잃고 싶지 않다. 이에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