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속 기억 상자를 찾다 - 한국 역사 속 인포그래픽과 이미지
방대한 정보가 흘러넘치는 지금, 보는 이들의 흥미를 자극하면서도 직관적인 전달력을 부여할 수 있는 시각화 방법인 인포그래픽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정보의 가치는 달라진다
수많은 정보들 중 코로나 19 바이러스에 대한 정보가 유독 눈에 들어오고, 오래 기억에 남는 정보의 시각화를 선보인 사례들을 보며, 문뜩 ‘누군가가 수십 년 후에 이 이미지를 보며 우리의 삶을 해석하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났다.
우리는 과거의 인포그래픽과 시각화된 이미지들을 보며 선조들의 모습을 유추해왔고, 서양에서는 많은 오래된 인포그래픽 사례들이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분석되어 왔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 속에선 어떤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을까?
잠깐! 2편을 시작하시기 전에 1편 ‘마구 쏟아지는 정보를 단단하게 정리해둔 인포그래픽과 이미지는 역사가 된다.’를 아직 읽지 못하신 분들은 1편을 확인해주세요.
대동여지도는 1861년 김정호가 목판으로 제작하여 간행한 초대형 지도다. 조각들을 모두 펼쳐서 연결하면, 그 크기가 무려 세로 약 6.7m, 가로 약 3.8m로 요즘 건물로 치면 3층짜리 건물 정도의 높이라 볼 수 있다. 22첩으로 구성된 대동여지도는 전체를 연결하면 전국 지도가 되지만, 각각의 장들을 접으면 책 크기 정도가 되어 휴대가 편리하게 제작되었다. 물론 조선시대에는 지도제작 기술이 발전하여,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내놓기 이전에도 국가와 민간에서 여러 종류의 지도가 제작되고 있었지만, 대동여지도야말로 그 모든 지도 제작 전통과 지리학적 정보가 시각적으로 집대성된 지도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다.
정확한 산줄기와 물줄기의 표현은 물론이거니와 현대의 지도처럼 지도표를 활용하여 지도에 사용된 기호들을 정리해 두었다. 각각의 산줄기의 모습을 크기와 중요도에 따라 다르게 표현하여 높이를 가늠할 수 있게 하였고, 심지어 제작될 당시의 지리적 정보뿐만 아니라 이미 사라진 지리적, 역사적 흔적까지도 찾아볼 수 있도록 제작하였다고 한다.
특히, <대동여지도> 목판을 보면, 정확한 지리적 지식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하고자 한 김정호의 끊임없는 노력을 느낄 수 있다. 여러 장의 인쇄가 가능했고, 하나하나를 필사할 때 생기는 오류를 줄였으며, 지도의 보급과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목판 안에는 김정호가 지도의 제작 완료 후에도 꾸준히 누락된 부분과 오류가 있는 부분들을 수정하고자 했던 흔적들이 남아있다.
수백 년 전 한국의 역사 속에서 아프리카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는가? 이 지도(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중국 원나라 때 (조선 1402년) 즉, 육백 년 전에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와 중국은 물론 아프리카의 지리적 정보까지 시각화하여 담고 있다.
이는 지난 1편에서 소개된 프톨레마이오스 세계지도보다 80년 빠르게 제작된 세계지도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세계지도를 보면 대서양에서 인도양으로 나가는 바닷길이 막혀 있으며, 유럽인들은 당시에 아프리카의 남쪽이 세상의 끝으로 죽음의 땅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보면, 대륙들의 실제 크기와 비례하는 비율과는 차이는 있지만, 지도에 그려진 대륙들의 모습은 전 세계의 바다의 모습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한국과 중국을 다른 나라들에 비해 크게 그렸다는 점에서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우리 선조들의 무지로 인해서였다기보다는 중국을 상당히 중요시했으며 중국과 함께 조선도 문화 대국임을 나타내고자 한 의도였다는 학자들의 의견이 더욱 신빙성이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태조 4년(1395년)에 돌에 새겨 제작한 별자리 지도로, 천문 현상을 12 분야(分野)로 나누어 차례대로 펼쳐놓은 그림이라는 뜻을 가진 지도이다. 중앙의 원형에는 총 1,467개의 별을 표시했고, 그 주변에 별자리 구획과 의미, 제작 의의, 제작 연월일, 제작에 참여한 관원의 이름 등을 설명한 글을 적어두었다. 즉, 우리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인포그래픽 사례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는 농경사회였기에 효율적 농업을 위해서 해와 달 그리고 별의 변화를 관찰하고 절기와 시각을 알아내는 것은 굉장히 중요했다.
따라서 오래전부터 하늘을 관측하고자 하는 노력은 역사적으로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으나, 천상열차분야지도처럼 모든 정보를 시각적으로 한눈에 들어오도록 정리된 사례는 드물다.
또한, 천상열차분야지도가 함축하고 있는 그 상징적인 정보와 의미도 무시할 수 없다. 동아시아의 대부분 나라에서는 ‘천명을 받아야 왕이 될 수 있다. (천명사상)’ 고 믿는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왕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준 하늘의 뜻, 천문학을 통해 이해하고 이를 세상에 반포하고자 했다고 한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하단부를 보면 권근*이 적은 설명이 있다.
*권근 權近: 1352 ~ 1409,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학자로 조선 전기 중추원사,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옛날에 평양성에 있던 본래의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석본이 전쟁으로 인해 강에 빠져 잃어버렸고, 태조가 천명을 받아 조선을 건국한 그해에 누군가가 그것의 인본을 바쳤다고 한다. 후에 돌에 새겨두라는 태조의 지시에 따라 권근과 10여 명의 학자들이 수정하고 연구하여 석각본을 완성해 두었다고 한다.
의궤는 조선왕조 500여 년의 국가 주요 행사들을 훗날 참고할 수 있도록 세세한 글과 그림으로 남겨둔 기록물이다. 그 가치가 고유하다고 인정받아 2007년에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되었다. 의궤와 같은 형태의 편찬 양식은 오직 조선왕조를 제외하고는 전 세계를 통틀어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왕실의 혼례, 장례, 사절단의 환대, 행차 등을 비롯한 왕실의 생활의 다양한 측면을 아주 자세하게 담아두었다. 행사에 사용된 의복과 물품의 이름, 모양, 수량, 빛깔 그리고 참여한 모든 인력의 그림과 이름까지, 의궤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누구든 감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을 듯하다.
물론,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순서) 많은 정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시각화한 인포그래픽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하지만, 다량의 정보를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글 뿐만 아니라 그림과 도해*와 함께 서술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행사와 의식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과 물품들의 위치와 같은 정보들은 한자로 설명을 더한 그림과 도표로 기록해 두었다.
*도해 : 글의 내용을 그림으로 풀이하여 보여주다.
현대의 학자들이 보아도 그 모든 부분을 단박에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세세하게 모든 내용들이 정리되어 있다. 심지어 모든 그림들이 채색되어 있으며 그 형태와 색은 현대의 시각 자료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가 보아도 세련되었다고 느낄 정도이다. 얼마 전 ‘왕조실록, 의궤 박물관’에 방문하였는데, 오랜 시간 의궤 속의 그림과 도해의 감각적인 아름다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의궤와 관련된 더욱 자세한 내용들은 후에 3편 및 디자인 결과물들과 함께 더욱 깊이 있게 다뤄질 예정이다.
위에서 설명한 네 가지의 유물들은 다량의 정보를 체계적으로 글과 그림을 통해 기록한 시각적 사료로, 그 가치를 인정을 받아 수백 년간 전해 내려오고 보존되어 왔다. 그리고 그 속의 정보들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이런 유물들을 만든 이들과 그들의 의도, 그리고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대동여지도에 대해 알아가다 보면 그 속에 들어 있는 ‘정보’ 즉 역사적 사실 외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이 지도를 펴낸 이유와 과정, 그리고 그는 누구인가.”를 궁금해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대동여지도와 김정호의 경우, 지도의 구체적인 제작 과정과 그의 개인적 정보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진 것들이 많지 않아서, 과거의 다른 기록이나 유물 속에서 힌트를 찾아 나가곤 했다. 그렇다 보니, 우리가 어릴 적부터 들어본 “김정호가 전 국토를 여러 차례 직접 유람하고 측정해서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라고 하는 전국 유람설부터 다양한 추측들이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물론, 김정호의 “옥사설”과 같이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왜곡되어 전해졌다고 추정되는 ‘설’ 들도 상당하기에 항상 깊이 있는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시각화된 기록일수록 시대가 지나도 즉각적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이 많다 보니, 그 기록을 통해 과거의 정보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제작 의도를 궁금해하고, 자신들의 시대적 가치관을 담은 해석을 덧대 나간다.
필자는 왜곡이 없는 제대로 된 역사적 사실을 알고, 그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가치관에서 비롯된 생각과 이야기들의 덧댐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나가는 것이고, 훗날을 살아가는 이들에게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질 또 다른 역사가 된다고 생각한다.
문자와 그림을 통한 기록은 사람들이 애초에 의도를 가지고 활용하는 경우가 많기에, 그 자체로도 상대적으로 다른 유물들에 비해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따라서, 그렇게 제공된 정보를 따라 깊이 있는 연구와 해석이 이루어진 사례들이 굉장히 많다. 반면, 기록 형태가 아닌 우리 선조들의 유/무형적 유산들도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 많으나, 그 가치들의 깊이가 직관적으로 전달되기 어렵다는 점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특정 유물에 대해 충분히 검토된 관련 사실들과 그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해석된 자료가 시각적으로 덧대지면, 그 고유의 가치를 한번 더더욱 널리 알려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앞으로 이 ‘발견 그리고 덧댐과 이음’ 프로젝트는
l ‘발견’ (과거): 그러한 보배로운 유물들 중 10개를 선정하여, 그와 관련된 우리가 왜곡되지 않은 상태로 꼭 알아야 할 역사적 사실들을 연구하고 찾아내어, 현대인들도 이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시각적으로 배치한다.
l ‘덧댐’ (현재) :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우리 유물의 정보와 가치를 정리해 나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가치관, 예를 들어, ‘필자가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과정, 필자가 느끼는 점들, 디자이너가 시각적으로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생각하는 것들, 역사학자가 개인적으로 더욱 끌리는 내용 그리고 전문가들의 견해’ 등을 덧댄다.
l ‘이음’ 그리고 ‘다시 발견’ (미래): 유물을 알아가며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고, 또한 이 글과 디자인 결과물을 보게 될 독자/ 관객과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새로 알게 된 정보를 바탕으로 이후에 스스로 더 찾아보고 관심을 가지게 되길 바란다. 독자가 다시 발견한 이야기들이 우리가 만든 작업물 위에 추가적으로 덧대질 수 있는 형태의 결과물을 제작해 나가려고 한다.
다음 편부터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해나가는 과정이나 선정한 ‘우리나라의 보배로운 유/무형적 유물 10가지’를 다룬 중간 완성물들을 부분적으로 공유하고자 한다.
도연희 문화 기획자/기업가, 슬리퍼스 써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