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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Jun 03. 2024

내일의 햇살을 기대한다. 그리고 기다린다.

김서윤


아름다운 벚꽃의 꽃잎도 이제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벚나무에 싱그러운 풀들만 남았고 소나무의 송홧가루도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가끔 창틀에 묻어나오는 것이 이 세상에 송홧가루가 존재했었다는 일말의 증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요즘에는 정말로 봄이 종적을 감추었음을 크게 느낀다.

유기체로 이루어진 많은 것들은 죽고 썩어나가다 결국에는 소멸하게 된다. 나무에 생긴 버섯, 흙에 생긴 곰팡이, 썩어가는 우유의 악취는 우리도 언젠가는 같은 운명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걸 느끼게 해준다. 우리가 밟은 이 땅도 어떤 생명체의 소멸로 이루어진 시작이자 끝의 이정표가 된다.

사람들은 동물은 그리고 또 나는 죽음을 두려워 한다. 그저 생명의 연장임에도 큰 돈을 들여 연명치료를 하고 끝없는 고통이 반복을 지속한다. 남는건 상처임에도 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영생을 원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이에대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한가지 질문이 있다면 영생은 과연 좋은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자아의 소명은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불에 댈까 무섭고 교통사고가 날까 무섭고, 엄마에게 핀잔을 들을까 두려운 것과 같은 감정이다. 하지만 불을 끄면 불에대한 공포는 사라진다. 두려운 대상이 제거되면 이제 두려움은 내 무의식 속에 다시 잠드는 것이다. 죽음에 관한 공포가 이런 것이라면 어떨까? 한번 느끼고 나면 아득한 무의식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하나의 본능에 불과하다면 말이다.

메타버스속 캐릭터가 음식을 먹어도 그저 배고픔 수치가 줄어들 뿐 그 캐릭터에게 실질적인 배고픔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영생을 얻는다면 두려움은 끝나겠지만 손끝으로 느껴지는 흰눈의 냉기, 그리고 추운 겨울에 틀어놓는 히터의 따듯함, 밀려오는 푸른 바다의 음률을 잃어야만 한다. 소멸되는 운명의 존재로써 삶이 생명체에게 허락한 것은 오감이다. 문이 있다는것 자체를 모른다면 아무 느낌도 들지 않겠지만 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문을 열 자격을 박탁당하면 문을 열고 싶어도 열지 못하는 현실이 고통스러워질 것이다.

당연하게 여기던 나의 목소리와, 월요일 아침의 무기력함, 물의 온도와 빛의 느낌, 밤의 어둠과 나의 그림자, 움직이는 팔다리와 묻어나는 연필 새의 날갯짓과 싱그러운 풀의 감촉 보이고 싶지 않은 습관들은 왜 우리에게 영생이 필요한지 묻고 있다. 인간 그리고 많은 유기체는 죽기위해 태어난다. 하지마 중요한건 결론이 아니다. 삶 만큼은 과정이다. 내일의 햇살을 기대한다. 그리고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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