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원
현실적이지 않은 이상에 눈이 멀어서, 가끔 나는 행복한 약물에 중독되고야 만다. 내 입장에서는 당연하다싶은 그 행위는 마치 현실이 전부 먹고 싶지 않은 채소들처럼 꼭 먹어야 하지만 계속해서 거부하고 싶어져서, 무언가 벗어나려는 핑계를 찾으려 하고, 트루먼 쇼의 트루먼과 같은 평범하고도 카메라를 보며 환하게 웃은 뒤 시답잖은 농담을 뱉는 것처럼 현실 속에서도 그런 행복한 입꼬리를 올리고 싶어 한다. 물론 나는 그렇게 더 나약해져 가기도 하지만 말이다.
머리가 아픈 사람들은 타이레놀을 먹어서 일시적으로 두통을 치료하고는 그것이 완치라고 착각한다. 두통을 가장 싫어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스터디카페를 가기 전, 아픈 머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타이레놀을 먹는 것이 너무도 좋았고 최상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어깨가 뭉쳐도 아무에게나 주물러달라고 요청할 수도 없는 마당에, 고통을 참아야 하는 현실을 흐리게 만들고, 아프지 않고 머리가 멀쩡한 상태 속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위의 문제로 자주 체했던 작년때에는 이러한 의존상태가 장기적으로 늘어났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면 배와 목구멍 쪽에서는 무언가 올라오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마치 엘리베이터가 청소기마냥 내 위 속 물질들을 저 높은 위까지 빨아들이는 것 같았고, 용암처럼 그것들이 안에서 들끓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건 머리 두통이었다. 철로 된 봉을 잡고 쭈그려 앉아 눈을 감고 눈물이며 식은땀이며 온갖 물들은 다 흘렸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그 두통은 내가 이 세계에서 느낀 최상의 고통이었고, 그래서 늘 무서워했던 병원을 가고 싶어했다. 옷을 꼬매는 바늘조차 무서워했던 어렸을 적에는 그 몇 초면 끝나는 주사도 무서워서 병원에 들어가기 싫어했었는데, 위가 약하다는 현실 속에서 많은 견딤과 시간과, 버팀이 필요 이상으로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다 부질없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두통이라는 고통이 내가 진통제가 들어있는 수액을 간절히 바라도록 만들었다. 한 마디로 참을성을 상실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속에서 나는 수액이라는 이상을 통해, 진통제라는 것을 통해 어차피 집에 들어가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다시 느껴질 그 시려운 두통을 없애려고 했고, 나는 그렇게 이상을 바라는, 일시적인 행복을 바라는, 의존적인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 되었다. 아마 그 때의 나에게 있어서 시뮬라크르는 소화제와 진통제라는 약이었던 것 같다.
채소는 몸에 건강하다. 사람의 면역력에도 도움을 주고, 체력 형성에도 많은 기여를 한다. 이 점에서 보았을 때, 채소와 비슷한 특징을 띠는 현실이라는 것도 물론 늘 회피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에게 가장 대표적인 채소는, 공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학생이라는 역할로써는 당연히 공부를 해서 높은 내신을 받아야 하는 기대를 받는다. 어깨가 뭉치면서 생긴다는 두통도 겪으면서 내가 성장하고 있으며, 도전하고 있구나 라는 것은 느끼고 있지만, 여전히 그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평소처럼 느긋하게 쿠키를 반죽하여 굽는, 아무런 이득도 혜택도 없는 행동은 아무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내가 이 빠르고 가혹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유일한 시간이었다. 앉아서 뚫어져라 문제집만 바라보면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큰 우울함에도 빠지고, 풀리지 않음에 답답함을 느껴 전부 집어던지고 싶다는 욕구도 생기는 방 안으로부터, 그러니까 나의 방이라는 하나의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종의 놀잇거리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소소한 행복들은, 당연하게도 현실로 돌아왔을 때, 전부 부질없어보이게 만든다. 차라리 그 시간에 공부를 하는 게 낫다는 시선들이 정장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티비 속에서도, 친구들과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장소에서도, 집 안에서도 들끓는다. 시험 공부를 했지만 하지 않았다고 거짓말 치는 친구들을 통해 행복을 느꼈지만, 결국 그게 거짓말임을 알 수 있기 까지는 오래걸리지 않았으며, 모임 속에서 은근슬쩍 시간을 아껴서 공부를 하는 게 맞다는 의견을 내놓는 상황들을 바라보면서 마치 트루먼쇼의 트루먼이 감독의 실수로 여러 인물들이 겹쳐 나와 의문을 갖게 된 상황처럼 내가 지금껏 생각해왔던 현실은, 실제 현실이 아닌 내가 원하던 현실을 바탕으로 한 이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 트루먼은 무슨 약속으로 동물원 원숭이가 됐죠? 죄책감이 없어요?”
“난 트루먼에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줬어. 오히려 우리가 사는 곳이 역겹지.”
“그에게 그곳은 새장이에요.”
“그러나 그는 언제든 그곳을 떠날 수 있었어. 마음만 먹으면 진실을 알 수 있는데도 시도하지도 않았지. 자네가 괴로운 건 트루먼이 그런 인생에 익숙하기 때문이야.”
-트루먼쇼
우리들은 늘상 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사실, 그 현실을 뒤로 하곤 했다. 시험은 그저 중간정도만 보면 되는 것이고, 2주전부터 힘들고 열심히 공부하면 반은 간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이 학생이라는 역할에 참여했다. 이 삶은 나에게 익숙했던 것 같다. 그다지 노력하지 않아도 하위권에는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론 나는 아이큐도 낮았고 노력은 그보다 더 낮았지만, 나보다 모든 방면에서 더 낮은 사람들은 내 밑에 너무나 많았다. 성적표에 E 라는 등급과 D 라는 등급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넣어다니고 있음을 보면서 나는 내 성적표에서 B가 최하점이라는 것을 보고 안심해했고, 만족해했다. 이런 시골의 이상들이 도시의 현실이라고 나는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다르고, 도시와 시골은 다르다. “지원이는 이제 아미한테 그만 만나자고 했다.” 선생님의 이 말을 듣고 정말 무서워졌던 것 같다. 중간만 해도 이 지역에서는 안정적일 것이라는 이 달콤한 거짓과 이상을 뿌려주었던 중학교 내의 분위기는 전부 가짜였음을 진정으로, 정말 밤마다 생각날 정도로 뼈저리게 느꼈다. 사회에서도 중학교 속 안정적이던 그 위치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문이, 너무나 당연하게 아니요, 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정말 아무리 사회를 배우는 중학교라 해도, 진정한 사회와 중학교는 달랐다.
이렇게 우리가 따라야 할 태도와 행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가끔씩 행복한 가짜의 모습들은 좋지만, 유튜브 속 나오는 키스오브라이프는 나에게 위로도 주며, 의지도 다지게 하며 행복도 주지만, 이것에만 의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사회에 나가서 아미와 대화는 나누지 못하더라도, 인사는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현실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 그 이상들은 아무래도 조금씩 내 머리에서 옅어져만 간다. 그러나, 우리들은 트루먼이 이상 밖으로 나가기 전 했던 농담 중 하나인 “굿 에프터눈, 굿 이브닝, 앤 굿 나잇” 처럼 현실로 뛰어들기 전,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기억들을 생각하면서 농담을 꺼낼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올라갔을 때 아미의 눈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그 상황들을 떠올리면서 그 행복한 상상들을 현실에서도 볼 수 있도록 해보겠다는 뜻이 담긴 ‘죽어라 하겠다’ 라는 농담을 뱉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트루먼의 대사 중 “오늘 못 볼지도 모르니 미리 인사하죠.“ 가 정말 이 아름다운 이상 속에 있는 사람들을 현실 속에 있을 자신이 다시는 볼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현실에 빠져드는 순간 정말 죽어라 하겠다는 농담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