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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스런 포만감

by 제이티

유지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죽음> _2025-05-03


‘주어진 시간은 참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나는 삶이라는 기나긴 여정을 떠나게 되는 지점에서 나를 그동안 품어 주었던 이 세상에게 마지막으로 건내고픈 한 마디이다. 나를 다시 찾아오는 자들이 이 글자들이 적힌 묘비명을 바라보며 조금이나마 웃게 되길 바라며.


'내 삶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한 단어로는 '죽음' 을 말한다. 죽음엔 이유가 없다. 경고도 없다. 그저 어느날 내가 가꾸어 놓은 인생이란 무대에 난데없이 들어오는 불청객인 것이다. 끝은 그렇게 참으로 허무하고 별 볼일 없다. 그동안 해왔던 수만번의, 수억번의 의미 부여가 칠판을 한 가득 채울 정도로 복잡한 공식이라고 해보면 이에 대한 결과는 ‘0’, ‘무’ 으로 너무나도 단순한 것이다.

우리는 불안에 떠는 동물이다. 불이 어두워지면 앞을 보지 못해서, 소리가 너무 꺼지면 너무 고요 해서, 그렇게 절대적인 평화는 다른 말로 '모름' 의 상태인 것이다. 특히나 우리는 미래를 걱정하고 두려워 한다. 그렇게 말 수 없다는, 미지라는 무언가는 공포스러운 존재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그나마 예측 가능한, 울타리를 짓고 정착 생활을 하며 안전을 보장 받으려고들 한다. 그렇게 '늘 같은 상태' 의 노예인 우리는 심심하고도 지루한 일평생을 보낸다.

그렇나 생각해 보자.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의 끝, 마무리를 디자인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오히려, 모험, 도전의 인생이 후회를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길이지 않을까? 무지함이 결국 전부인 우리의 삶은 어쩌면 그저 롤러 코스터 인 것이다. 롤러 코스터는 아기들이 타는, 느리고 여기 저기 스티커가 붙여져 있으며 알록달록 색갈로 꾸며져 있는 코스가 있는 반면, 귀가 멍멍해 지고 이빨이 시려워 지는 듯이 얼얼해져 오는 스피드의 성인용 또한 있다. 후자의 경우 오르락 내리락이 과감하며 조마조마 하고도 신이 난다. 고함을 마구 지르고 기구에 서 내리면 나는 ‘아 알차게 잘 놀았다’ 하고 만족하게 된다. 전자의 경우는 이와는 반대로 잔잔한 물결을 따라, 갑작스런 놀래킴 없이 한 바퀴를 돌아 본다. 성인용을 도잔 해 보려다가도 360 도 회전이 있다는 말을 듣고 겁에 질려 어린이용의 시시하지만 가슴 졸일 일은 없는 익숙한 코스를 다시 찾아 가는 나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쯤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맞서려 하지 않는다. 두려움을 극복해 내려는 용기를 낼 시도를 피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집에 돌아온 9살의 나는 미련 가득해 ‘한번 타 볼걸 그랬나’ 라고 중얼거린다.


“몸은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인 동시에, 세상과 단절되는 벽이기도 하다.”_지문 중에서

그렇게 육체는 필요 이상의, 묻지도 않은 여러 불쾌한 감각들을 은근 슬쩍 들이댄다. 그저 배경소음과 같았던 이 불편함은 사소하게 업신 여겼다간 우리의 꿈과 가능성의 한계치가 되어 길을 막아서거나 정말 분이 날 정도로 일들을 망쳐 버리기도 한다. 나라는 한 개인을 담고 있는 신체라는 껍데기는 잘도 부러지고 당당하게 고쳐지기를 요구 한다. 이런 요구사항은 무시하면 더 큰 구멍을 뚫어 내기에 외면 하지도 못한다. 이 형편없는 몸뚱아리는 매일 세번의 식사를 해 주어야 되고 목이 마르다며 나의 운동시간을 방해 하기도, 좋은 성적을 위해 벅찬 숨을 누르며 달리기를 계속한 내게 복수라고 하듯 다음날 아침 인상이 찡그려 질 정도의 심각한 근육통으로 화풀이를 하기도 한다. 그렇게 인간이란 최악의 조건의 몸에 넣어진 우리의 정신은 이에 종속 되어 원하는 만큼 사고를 뻗어 나가지 못하게 된다. 작품 <죽음>의 저자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또 다른 유명한 작품 <나무> 의 ‘완전한 은둔자’ 라는 이야기에서 귀스타브가 신체를 포기하고 정신만 남겨 졌을 때 전에는 미쳐 뻗지 못했던 무한한 지식을 탐험해 볼 수 있었다 하는 것도 육체적 한계에한부터 자유 로워진 우리를 보여 준다.


다들 Yolo 를 외치며 인생은 한번뿐이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여라 하고 말을 뱉어 보지만 정작 이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물다. 행복은 공중에 떠다니는 기체와도 같다. 저울질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나는 네 인생을 살아 보지 못한 반면 너 또한 나의 인생을 살아보지 않았는가. 우리는 남의 행복의 정도를 알지 못할 뿐더러 자신이 행복한지 조차도 가늠하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는 행복을 액체로, 고체로 굳히기 위해 '급 나누기'를 하고 '기준' 을 세운다. 이렇게 인공적으로 정해져 입을 타고 또 입을 타 어느새 원래 그런 것이 되어버린 행복함의 기준은 끊임없는 비교의 우리 사회를 이루게 된다. 우리는 남의 떡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헤헤 하며 웃는다. 남의 가소로운 점수를 보고는 속으로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행복함을 정의 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준은 우리를 행복하게, 혹은 불행하게끔 만든다.


고전 이야기들을 읽어보면 여어쁜 처녀는 슬픔에 잠겨 물 속에 몸을 던지고 상실한 사람들은 자결을 선택한다. 그렇게 내가 뛰는 이 삶이라는 게임을 언제 끝낸 것인가는 플레이어인 나의 손에 달려있는게 맞지 않을까. 숨을 쉬는 것에서 은퇴를 하고 싶다면 은퇴를 하고 눈을 깜박이는 것에서 해방 되고 싶으면 해방 되고 가난, 고통, 굶주림 등의 육체적 아픔을 그만 두고 싶다면 그만 둘 수 있는 권리, 이는 한명의 인간으로써 모두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 시시포스의 형벌을 보아라. 우리 인생은 말도 안되는 열악한 환경에서 고작 두눈, 두 손, 두 다리를 가지고 날카로운 이빨도, 뾰족한 발톱도 없이 그저 버텨야 하는, 길고도 긴 고독도로이다. 숨을 돌릴결도 없이 안간힘을 써서 저 위의 꼭대기 까지 돌을 굴려 올리면 다시 떨어지는, 고통과 상실감의 연속일 뿐이다. 그만하고 싶다는 판단, 안락사의 허용 여부를 두고 사람들은 과연 '자기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권리' 는 지켜져야 하는 가에 대해 갈등한다. 그렇게 한 사람이 태어나고 한 사람이 죽는 다는 것은 예쁘게 플레이팅 된 접시를 음미라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맛이 없다면 이 음식을 퉤 하고 뱉어도 괜찮은 것일까? 만일 모두가 음식을 맛보기를 거부 한다면? 그렇다면 구역질 나는 음식을 억지로 꾸역꾸역 먹이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행위라고 볼 수 있을까? 나의 인생은 만족스런 포만감으로 마무리 되길 바라며 언젠간 건내게 될 마지막 인사를 끄적 거려 본다. ‘주어진 시간은 참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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