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해가 지는 곳으로>
호랑이와 나_
유지민
당신은 배고픔이라는 고통을 느낄 때면 호랑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물 표면에 비친 그런 네 모습은 거친 털이 주황색, 그리고 검정색의 줄무늬를 멋스레 자랑하고 있을 테고,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해 보면 윗니, 아랫니 모두 빼곡히도 줄 지은 날카로운 무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손을 들어 인사를 해보자니 발톱은 가딱 했다가는 돌도 자를 수 있을 것만 같으며 단단한 가죽 아래 로는 숨을 드쉬고 내쉴 때마다 오르락 내리락 하는 심장의 열나는 활동이 살아있음을, 그리고 나는 존재함을 매순간 일깨워 주었다. 그렇게 반사된 맹수의 그 사납고도 강한 몸뚱아리는 무엇이든, 누구든, 단숨에 등이 닿도록 하여 눕여 갈기 갈기 파토 낼 수 있게도 위협적이였으며 준비된 사냥꾼의 모습이였다. 잘못하고 툭 건드렸다가는 잡아먹힐 듯한 기세를 띄며 호랑이의 매서운 눈동자는 먹잇감을 찾아 오른쪽으로, 그리고 왼쪽으로,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를 유지하며 오고 갔다. 그렇게도 공포스런 짐승은 네 안에 언제나 포식하고 있으니, 우린 이를 두렵고도 야만적인 ‘본능’ 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평소엔 이 본능이란 호랑이는 세근 세근 잠을 자도 있도록 교육 받는다. 그러나 잠깐, 한눈을 판 찰나에 그의 목줄을 실수로 놓쳤을 때, 이 동물은 나의 인간 입을 통하여 으르렁 대고 나의 한정적인 코를 가지고 사냥남을 찾으며 나의 매섭지 못한 눈을 부라리도록 하곤 한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하이드씨 처럼 우리의 본능이라는 친구는 갑자기 몰려오는 스나미 처럼 잠잠히, 얌전히 있다가도 울컥하고는 분노를 표출 하는 것이다. 과연 이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알겠나? 만일 이를 통제 하지 못한다면 어찌하여 인류는 오늘날의 오밀조밀 모여 사는 문명사회를 유지 할 수 있겠는가. 만일 이 야생의 성격에게 자유를 준다면 모두가 호랑이의 인상을 쓰고 서로에게 덤벼들지 않겠나? 때문에 우리는 각자에게 채찍을 쥐어주며 사회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네 안의 호랑이를 잘 길들여라 하고 당부를 받는다. 이 채찍은 양심이나 죄책감, 법과 윤리를 따르려는 상상의 질서 따위가 될 것이고 말이다.
그러게 인류는 평화와 질서에 대한 굳은 믿음을 불려 오며 야만의 시대를 벋어 나왔다. 이는 스스로를 우월하다며 자부하는 우리들을 저기 동물원 철장 안에, 혹은 야생 초원에 뛰다니는, 누구는 날개가, 꼬리가, 온갖 잘난 무기들이 장착 되어 있는 동물들과 차이를 주는 가장 결정적 요소라고 꼽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연약한 우리의 강력한 무기도 어느 상황을 맞이 하게 되면 무너지곤 한다. 문명은 우리의 생존 본능이 그 어느 무엇 보다 앞서게 되는 다급한 경우에 파괴를 맞이 하게 된다. 며칠 동안 굶은 자가 식사 예절 따위를 갖추겠냐는 것이다. 그저 앞에 있는 자를 밀쳐 내고 빵을 맨손으로 집어 보기 흉하게도 입 속으로 쑤셔 넣을 것이 그려지지 않은가. 이와 같이 호랑이가 채찍의 따가움 따위는 무시하고 날뛰는 일들은 ‘살아야 한다’ 하는 고리의 생각이 번뜩 나를 깨울 때 찾아오곤 한다.
소설 <파이의 이야기> 를 아는가? 위에서 묘사한, 딱 그런 상황에 주인공은 놓이게 되고 수백장을 채우는 이야기 내내 자신을 호랑이와 인간이라는 두가지 자아로 분리하여 표현 하였다. 파이는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구명 보트를 타고는 277일의 고통스러운 표류기를 시작한다. 그는 횡패한 바다 한 벌판에서 할 것도,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었으나 끝까지 용케 살기 위해 몸부림 친다. 그는 이 과정에서 어린 소년으로써의 이성을 모두 잃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는 눈 앞에서 엄마가 살해 되는 것을 목격 해야 했고, 곧 엄마를 벤 요리사의 칼을 그의 주인에게 돌림으로써 생애 첫 살인을 저질렀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북을 때려 잡아 야만스레 잡아 먹었으며 피 한방울 까지도 남기지 않으며 빈 등껍데기를 핡으며 갈등을 극복 했다. 그의 다사다난한 모험 가운에 그는 믿기지 않게도 자신과도 같이 해양을 길 잃은체 떠도는 또 다른 인간을 만나게 되는데 책의 무거운 단어들은 호랑이가 그 나그네를 덥쳤으며 굶주린 배를 더부룩 하도록 채웠다 하고 말한다. 또 다른 인간을 죽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도 잔인한 일이 당연해 지는 순간 우리는 알 수 있다. 나는 이제 문명 밖의 짐승이 되었구나. 이와 같이 재앙은 광기를 불러낸다. 이 공식은 어쩌면 언젠가 우리 인류의 종말을 책임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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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이 바라는 건 내가 나를 홀대하는 거야. 내가 나를 하찮게 여기고 망가트리는 거지. 난 절대 이 재앙을 닮아 가진 않을 거야. 재앙이 원하는 대로 살진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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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우아하게 먹느냐,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얼마나 신사답게, 숙녀 답게 식사를 하는가 따위는 한낮 의미부여 이였을 뿐, 모두가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야생의 시대가 닥쳤을 때 그다지 중요한가, 싶을 지도 모른다. 허나 ‘인간다움’ 이라는 표현을 살펴 보면 본능 대로 사는 것은 여느 짐승들과도 다르지 못하니 아닐테고 반대로 이보다는 존엄성 혹은 가치 등을 명예로히 하는 것은 인간만이 고유 하기에 결국 인간답다 라는 것은 아비투스를 서툴리나마 따라 하려는 우리들의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재앙 속에서 인간다움을 지켜 내려 한다는 것은 운명을 향해 패배가 정해진 투쟁을 감히 벌여 본다는 것이다. 이는 과연 하찮은 것이, 혹은 어리석은 일이 절대 아니다. 이는 흔히 영화 속 열광받는 영웅의 두발 딛고 굴복하지 아니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네가 살아가는 이유는 결국 달리 정해진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 네가 개척하기 나름인 것이다. 부디 자신의 삶의 영웅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