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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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떠도는 영혼, 목적지 없이 유영하는 삶. 이를 더 간단하게 요약하면, 청소년의 삶이 된다. 우리들이 서있는 곳은 어디인가. 어떤 제형의 땅인가. 어떤 냄새가 풀풀 풍기는 장소인가. 땅은 고르지 못해 뛰고 걸을 때마다 시야가 양 옆으로 골고루 기울어지며, 다른 이들의 열정이 불타는 기분나쁜 쾨쾨한 냄새가 난다. 그런 장소에는 여러가지의 목적은 전부 사라지고, 하나의 숙명으로 살아가는 이들만이 살아남았다. 그 숙명의 이름은 자녀의 보답이었다.
산업화는 우리들이 태어나기 100년 전조차 되지 않았을 때 생겨났고, 현재에는 많은 이들이 치를 떨고 긴장해야 할 만큼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사회는 이런 발전들을 우리들에게 안겨주며 무엇이라 속삭였을까. 아니 속삭이지도 않은 채로 한가지의 미션지만을 우리들이 서게 될 자리에 남겨두었을 것이다. ‘가족에게 의지하라‘ 이 문장은 너무나 많은 감정이 들도록 만드는 것 같다. 경쟁과 질투, 불안과 견제의 흐름을 만든건 사회 본인이면서, 고작 우리들의 혼란의 감정을 잠재워주는 역할을 가족에게 떠넘겼으니 말이다. 또 이 문장은 이미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곧 우리들이 다시 날카로운 사회 속에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반도 못 간 채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만들고, 홀로 독립하지 못하는, 그런 나약한 존재를 생성시켰다.
그러나 이 사회의 더 큰 문제점은 따로 존재했다. 바로 고도압축성장이다. 앞서 말했듯, 산업화가 진행되기 시작하고, 여러 생활 속 전자 편리품들이 등장한데에는 100년전쯤밖에 되지 않았다. 이 말은 즉, 천천히 여러 법 제정의 단계와 확인의 단계 등을 거치지 않은 채로 너무 급하게 커다란 결과물을 만들어내버렸다는 뜻이다. 이를 통해 불안정한 형태가 되어버린 것은, 우리들의 삶 뿐만 아니라, 부모님들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이상하게 부모님이 아는 노래와 우리가 아는 노래의 공백은 걷잡을 수 없이 넓고 크다.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음악앱 멜론에서 신 음악 기술들이 마구 입혀진 노래를 틀어놓을 때면, 엄마는 ‘이건 무슨 노래야?‘ 라고 여쭤보신다. 이처럼 사회의 발전이 점점 더 가속화 되다보니, 우리 가족의 관계에는 어쩔 수 없이 깊은 골이 생길 수 밖에 없고, 문화지체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기사님이 그러셨다. ’딸은 엄마랑 잘만 다니면서 아빠랑은 잘 안 다녀. 크면서 더 서로 안 맞게 되는 것 같아요.‘ 가족들은 사회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은 터라, 아이를 잘 지켜내고, 잘 보호해야 하며, 누구보다 더 잘 보였으면 하는 기대와 마음이 크다. 그래서 더 노력하지만, 부모들의 문화지체는 이 노력에 슬로우모션을 건 듯, 부모들의 노력이 더 좋지 않은 영향을 가져다주게 만든다. 알아가기 위해 계속해서 질문하고 서투른 모습을 보여주는 중산층의 부모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과보호‘, ’간섭‘, ’맘충’ 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기도 하고, 정작 이 키워드가 사용되어야 하는 대치동의 부모들에게는 오히려 그들 사이에서는 존경이라는 감정이 더 잘 발견됨을 알 수 있다.
사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문제는, 저출산, 아니면 자살률이 된다. 아니, 사실 이 두가지의 경우에는 너무 많이 노출된 문제이다보니 이제는 점점 사람들에게로부터 무덤덤해져가는 것도 같다.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너무나 흔하게도 ‘경쟁 사회‘ 가 이유가 된다. 개인주의적 행동이 보편화되고, 상호적 신뢰가 귀해지는 사회 속에서 자신의 아이가 온 몸의 근육을 써가며 고통스럽게 더러운 물 속에서 수영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자살률을 통계로 냈을 때, 늘 상위권을 유지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살펴보면, 우리 사회라는 수영장의 물이 얼마나 더럽고 아이들의 건강에 해로운지를 알 수 있다. 이렇듯 험한 세상에서 버티는 아이들이, 배려라는 마음을 갖기란 얼마나 힘들까.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국민 302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4년 사회정책 국민 인식 조사’에서도 이 같은 흐름이 확인된다. “우리 주변에는 사회나 타인으로부터 고립된 사람이 많다”는 문항에 응답자의 74.0%가 ‘(매우) 동의한다’고 답했다. ‘우리나라 사회통합 수준’을 10점 만점 척도로 평가한 결과는 평균 5.10점에 그쳤다. (중략) ‘위기 상황에서도 함께 대응·극복하기보다는 개인주의적이고 분절된 방식이 남았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이 자료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재 사람들은 고립된 생활과, 불신 가득한 외로운 삶을 사는 비율이 다수이다. ‘너 따로, 나 따로‘ 라는 개념은 우리 실생활에서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노출되고 있다는 점 또한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윗집 아랫집에게 내 발에 맞지 않는 인라인스케이트를 기부하지 않고, 이사온 이웃들은 이사 기념 떡 선물이 아닌 인테리어 공사 허가 싸인 명단을 들고 집 문을 두들긴다. 누군가와 자연스럽게 서로의 것을 나누고, 그렇게 정을 공유하는 것이 이제는 금지된 것처럼 여겨질 뿐이다. 이제 한국의 대표 간식이던 초코파이의 ’정’ 이라는 단어는 떼어야 할 때가 온 것은 아닐까.
이런 불안정하고 불편한 사회 속에서, 부모들은 우리들의 음식에 고춧가루를 듬뿍 넣은 것마냥 우리들이 음식을 먹을 때마다 계속 사레들리게 만든다. 그렇게 불편함을 나타내는 기침을 여러번 뱉어내고서야, 부모의 소망들이 영어듣기평가처럼 줄줄줄 흘러들어온다. 차라리 영어듣기평가 때 뚜렷하게 들렸으면 하고 내 귀에게 바랬는데, 하필 원하지 않던 이 상황에서 내 귀는 제기능을 발휘한다.
우물 안 개구리. 너무나 쉬운 사자성어라서 초등학교 3학년도 이는 너무나 가볍게 발음할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쉬운 사자성어가, 우리 사회에서는 가장 어려운 문제로 등록된다. 사람은 기대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가. 그게 크면 클수록, 더 크게 열패감을 느끼고, 부끄러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풍선도 그렇지 않는가. 풍선 터트리기 게임을 준비하는 사장님이 풍선의 바람을 빼는 이유도 잘 터지지 않게 하기 위함인 것처럼, 자식이라는 풍선에 ‘기대‘ 라는 바람을 실컷 불어넣게 되면, 실패라는 바늘이 찔려들어왔을 때 가장 큰 소리를 내며 가장 쉽게 자식이라는 풍선이 보잘 것 없이 터진다.
실패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진한 열패감을 남기지만, 부모에게는 이 자국이 커피 잔의 입술 자국과 같아서, 한 번 손으로 슥 흝으면 금방 지워질 줄 안다. 이렇게 아이들의 부담감과 자존감의 왜소함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를 고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족은 실패의 기억을 순화시켜주는 역할이지, 실패의 기억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분투해야하는 미련한 역할이 아니다. 불안한 우리들이 미련한 역할에 기대고 일시적 안정감을 느끼게 놔둘수록 우리들은 점점 왜소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작아지고, 작아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