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윤
이제야 눈을 감다가 다시 일어났을 때의 그 찌뿌둥함은 이제 그만 만끽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었다. 길을 때리듯 짜증이 묻은 나의 발자국을 뒷 저편에서 바라보다 보면, 저 앞 아득한 학교 뒤로 똑같은 두 줄의 체육복과 두 발의 보폭이 일정한 속도로 나를 지나쳤다. 모두 다 이어폰을 끼고 분명히 노이즈 캔슬링을 했겠지, 다들 똑같은 체육복에 같은 색의 운동화와 같은 색의 가방을 매고 머리를 휘날리며 길고 긴 오르막길을 기어가듯 등반하였다. 내가 중간에 서있어도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나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도, 내가 투명인간이라 보지 못하였던 것도 모두 아니었다. 빈틈없이 날 감싸안는 아침 속 안개처럼, 서툰 실수가 가득한 길거리 속 접지름의 감각과 넘어짐도 어쩌면 새로운 변화일지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음에, 자연스레 누군가와 숨을 맞출 수 없다는 게, 누군가는 각자 다른 신체를,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마치 신기한 동화를 접했다는 듯 눈을 반짝할 수 없다는 게 이제는 아쉬웠죠, 울적했다. 그래서 나는 높은 굽을 신다가 가끔 발을 접지르는 것에 대해 짜증을 느끼지 않는다, 자세히 말하자면 그렇게 느끼지 않도록 나를 적응시켰다. 누군가는 그걸 "넘어진다", "다친다"라고 배웠지만, 난 그걸 "새로운 변화"라고 받아들였다. 성하지 않은 자국은, 굵어진 허벅지는, 누군가에 다리에 나는 털은 보기 싫은 게 아니라 조금씩 성장하는 거란 걸. 길바닥을 때리듯 걸으면서 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이런 건전한 말을 하긴 부끄러웠다. 그래서 난 누군가의 변화를 조용히 보기 보다는 갖고 싶었던 것 같다.
사실 요즘은 하루가 그냥 너무 평화롭게 흘러가서 두려운 것 같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못하게 했고, 수업 미참여로 숙제를 하는 사람들에게 벌점을 준다고 강요하였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밥은 안 먹고 있었던지도 오래였다.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던 친구들이 나랑 말을 섞는 친구들의 뒷담을 대놓고 하는 것도 본 적 있다. 이젠 어설프게 맞물려가면서 무언가를 해결해야 한다는 느낌에 너무 익숙해진지 오래였다. 그들에게 나는 보이지 않았을 테고, 마치 자본주의계의 보이지 않는 손과도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여기서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란 히틀러나 길드처럼 뒤에서 크게 후원해주는 비밀 후원집단이나 조직이 아닌, 그저 겉돌지만 누군가에게 정말로 해가 될 수 있는 사람으로 재정의하였다. 난 누군가에게 해가 되고 싶지 않았기에 조용히 있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나를 괴롭힘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제는 그러려니 했다, 엄마가 그런 잡초 같은 인간들과는 상종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혼자 울적해질 때면 누군가의 불행은 당연하다고 애써 합리화해본다. 집단에도 기회비용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기회를 잡으면 그에 따라 잃는 것도 있을 터, 난 그 잃는 축에 속하는 듯 하였고, 잃어도 괜찮다는 쪽에 속해있는 듯 하였다. 그래서, 집단에 정을 주지 않은 지도 오래다. 사실 이제 누군가가 말을 걸면, 많이 어색했고 다시 혼자 있고 싶었다. 말을 안 해서 그런 건가, 활발했던 내가 그립기도 했다.
다시 다른 아이들의 일상으로 돌아가보자. 그들은 언제나 똑같았고, 똑같을 예정일 것만 같았다. 마치 그저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계속 웃고 있었고, 누군가와 수다를 떨며 무시하는 건 기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수업시간에 대답하지 못했다. 질문을 하면 대답하는 법을 잘 몰랐고, 특정한 아이들만 대화를 하며 점수를 얻어가는 방식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내가 정말로 화났던 일이 있었는데, 우리반에서 수상실적이 별로 없는 아이들을 모아서 모범청소년 상 비슷한 걸 주었던 사건이 있었다. 사실 많이 미웠다. 그들을 보면서 난 말이 없을 뿐 노력하는데 왜 그런 애들은 선생님의 눈길 한 번에 가산점을 턱 받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말 마음을 삭히고 또 삭혀보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는 그렇게 시간을 쏟는 건 너에게 마이너스라면서 그 시간에 단어를 외우는 게 더 좋다고 말했다. 처음으로, 플러스 마이너스에 대한 역겨움이 치솟기 시작했다. 자본주의는 인생을 이분법적으로 만든다. 플러스 마이너스로, 앞으로 뒤로, 위로 아래로, 모든 것이 모 아니면 도였다. 성공이면 성공이었고, 실패면 실패였다. 마치 반항하는 나라는 가차없이 멸망시키고, 그 전에 항복하면 그들의 풍습이나 여러 문화를 받아들이고 우호적으로 대했던 칭기즈칸의 정책이 생각나는 듯 하다. 우린 모두 그렇게 평가되었고, 어딘가에 적혔다. 수상실적도, 교외 상도, 모두 고입 진학을 위해 쓰이는 자양분일 뿐이었다. 딱히 의미는 없었다.
자본주의는 학생들의 생각을 획일화시키고, 학부모를 악마로 만들 뿐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는 학부모들을 많은 돈으로 꼬드기고 잘 안되면 학생들의 과실로 단정짓는다. 업무상 과실치사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학생들의 공부도 어쩌면 학생 자신에게, 학부모에게 엄청나게 중요하다. 지금 무언가가 나의 미래 인생을 일단락시킬 수 있다는 게 학생들의 부담을 가중시킬 뿐이다. 그렇기에 그저 미친듯이 풀어야만 했던 학생들은 12시가 지나도, 1시가 지나도 잘 수 없었다. 내가 지금 1분 안하는 것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면서 누군가와 손을 맞잡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이렇게 드문 일일지도 난 몰랐다. 고등학교 입시는 알아도 너무 알 게 많았다. 고입의 원서 접수와 말하기 대회, 어떤 과목을 신경써야 하는지도 힘들었다. 하지만 버텨내보려 애썼다. 요즘 받는 수학 공부를 잠깐 언급해보자면, 정말 행복했다. 그렇게 제대로 공부해 본 적 없었던 수학이 너무 싫었었는데, 과외를 하면서 수학이 너무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답이 딱딱 나오는 수학처럼 자본주의 사회도 돈으로만 되지 않는 사회면 좋겠다. 말로만 학생들의 인권을 추구하며 교육 견해를 적극적으로 반영한다는 우리 학교 교장의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우리의 진정한 선두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요즘은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사회가 왠지 싫어졌다. 그리고 많은 시련을 주는 세상이 좋아졌다. 나는 아직 너무 망상을 많이 하고 있나 보다. 현실을 너무 모르는 듯 싶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의자에 6시간 앉아본 순간에야 깨닫게 되었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문제만 풀다 보면 시간은 어느새 지나가 있고, 누군가의 어깨에 무겁게 올려진 부담과 무게에 대해서 체감하게 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자본주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내가 상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기업 직장인 생활로 깨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부장의 책상을 뒤짚어엎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다기엔 너무 큰 목표만 세우고 있는 걸까, 지금을 더욱 노력하는 걸로 하자, 아니다 이러한 목표는 어떨까? 라고 반복해서 생각해보았다. 그렇다기에 내가 자본주의 세계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없었다. 내가 본 거라곤 그저 힘듬에 찌들어 있는 직장인들과 대학생들의 모습과, 언제나 입시 이야기를 하며 나와 경쟁하는 엄마 아빠, 매일 똑같은 교복에 똑같은 이야기에 나에게 무언가를 던지고 맞추면서 즐거움을 찾는 친구들 뿐이었다. 그래서 난 내가 좋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믿을 사람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면, 더욱 더 상위에 올라야 했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게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공동체적인 생활에서 모순적이게도, 왕따인 것에 감사하였다. 누군가는 이러한 생활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 있겠지만 이 기회는 나에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누군가에게서, 세상에게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빈틈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인간을 가능성으로만 판단하는 편향적이고 편파적인 사회에서 종합적인 전형 판단을 한다는 교육부와 평가원의 거창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귓구멍에 감사하며, 수시 원서 모집과 대학교 간판을 보며 경쟁하는 시대 인재의 재수 학원생들의 영상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눈에 감사하며, 학원을 알아보려고 뛰는 다리와 모든 지식을 종이에 담으려 애쓰려 하는 나의 팔과 손, 손가락 하나까지도 모두 감사하다. 항상 실수를 하지 않는 인간도 없지만, 세상을 너무 편히 살아갈 수 없는 현존하는 인간들에게 나 자신을 한 번도 되돌아보라고 하고 싶다. 그대는 무엇을 갈망하였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누군가에게 휘둘리고 있지 않는가? 지금의 당신의 삶이 행복한가? 앞으로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마음이 존재하는가? 그대는 누군가에게 기억될 수 있는가? 매일 똑같은 삶에, 똑같은 구조와, 똑같은 검사와, 똑같은 돈의 지급이 이어지는가? 이러한 삶을 지나온 지난날의 자신을 기억하는가, 그 영겁의 시간 속에서 당신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삶의 불완전함과 모순을 느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질문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누군가에게 자랑거리로 내세울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