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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by 제이티

류호림


D- 21900


요즘 친구들끼리 정병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쓰는 것같다. 정병은 정신병의 줄임말을 말하는데, 외모 때문에 우울해지는 외모정병이 대표적으로, 자기 자신의 마음에 안드는 나의 모습을 마주할 때 정병 걸릴것같다, 라는 말을 많이 쓴다. 친구들의 정병타령을 들을 때면, 그저 말없이 친구들의 말을 듣기만 하는 나였다. 내가 행복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저, 나의 약한 내면을 굳이 드러내기 싫었다. 내 인생의 일상이었다. 한번도 그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항상 엄마에게 툴툴되고 반항하지 않는, 친구들에게 한결같이 웃어주는 착한 아이는 아니었으나, 수업시간에 발표를 할 때도, 친구들과 다같이 고민상담을 해도, 결코 내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정말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진실하고 깊은 친구도 없었고, 모두 나와 겉으로만 친한 겉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를 꽁꽁 숨기는데 당연히 깊은 관계를 맺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꼭 이것이 나의 신중함 때문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의 고민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저게 그렇게 힘들었을 일이었을까, 죽고 싶고 정신병 걸리고 싶었을 만큼 힘들었던 일일까, 잘 공감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깨를 토닥여주며 다정한 형식적인 말을 건네는 것밖에 없었다. 일종의 자만이었을까, 너희의 시시콜콜한, 언젠가는 헤어졌어야 했을 연애의 끝맺음과, 공부는 하지 않고 스카를 가서 친구들과 4시간동안 떠는 너희가 너희의 점수를 보고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현재의 나의 막막함과 답답함, 어디기 뚫린 질 모르고 나를 갉아먹고 있는 구멍을 찾아내지 못하는 두려움이, 나 자신에 대한 자책감과 실망감과 머리가 하얘지고 멍해지는 무서움과 감히 비교나 할 수 있을지 그 허약해빠진 눈물에 화가 나기도 했다. 글을 적어내려가 가다보니 참 자만심으로 가득 차있었구나, 하는 죄책감이 들면서도, 나의 고통이 그들의 하찮은 고민보단 고급진 것같아서 나름 만족스럽기도 하는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항상 싸늘했다. 성폭행당한 피해자를 보면 왜 이렇게 야한 옷을 입고 돌아다녔냐, 왜 어두컴컴한 거리를 걸었냐는 훈수부터 시작해서, 악플에 시달리며 힘들어하는 유명인들에게 돈을 그렇게 많이 버는데 그 정도는 감당해야 된다, 는 역겨운 충고까지, 심지어는 이미 자살로 죽은 어린 아이에게 상황도 전혀 모르면서 무책임한 말을 무심히 던지는 댓글 하나하나까지. 학교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를 보며, 신고는커녕 내가 피해를 입을까봐 감히 다가가지도 못해 방관하다, 결국은 마음에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입는 피해자 아이들이 수두룩하다. 무엇보다 나뿐만 아니라 나에게 심각한 고민이 생기면 이를 나만 알게 하고, 마음 깊숙이 밀어두고 숨겨두는 현대인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항상 밝고 행복한 것만 같았던 내 옆의 동료가 어느날 우울병이 걸렸다는 소식을 전해듣거나, 전교 1등을 하다 전교 3등으로 떨어져서 겉으로는 괜찮아보였을지 모르겠지만 지역균등을 받지 못할까봐 그 초조함에 아파트에서 며칠 전 뛰어내렸다는 우리 지역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가 더욱 와닿게 되는 것같다. 이러한 사회의 분위기적인 문제들의 근본적인 원인을 본격적으로 파헤쳐보자면, 우리 사회는 오랜시간 뿌리내린 농경 사회 속, 전통적으로 체면과 평판을 중요시해왔었는데, 내 집단에서 누군가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것은 집단 전체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불미스러운 일에 연류된 사람은, 그것이 피해자건 가해자건 우선 피해야 할 존재가 되어버렸다. 마치 불길에 타들어가는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까지 불길이 번지면 안되니 그 자리를 서둘러 피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도, 나의 허약한 부분을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왠지 숨겨야 할 것같고 강한 모습만 보여야 할 것만 같은 현대 사회까지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근본적인 뿌리가 되지는 않았나 싶다. 대표적으로 sns, 인스타그램 등이 있을 수 있겠다. 내가 어떤 사건에 연류된 사람이라던가, 불행하고 찝찝한 일에 관련된 사람이면 굳이 엮이고 싶지 않고, 그렇게 고립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기에 우리는 우리의 삐져나오는 지울 수 없는 상처들을 내뱉어서 연하게 만들기는커녕 더욱 쑤셔넣어서 나 자신을 아프게 한다. 어쩜 그 아픔의 끝도 자해와 자살, 남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나 자신만 긁어내는 행위로 자신을 위로한다. 참 모순적인 말이긴 하나, 자살과 자해가 자신의 인생보다 나으니까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일 거다.

뿐만이 아니다.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쓰게 된 우리는, 자의식과잉와 망상에 빠져 초조해진 우리는 성급한 성공을 원한다. 그리고 그것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크게 실망을 하고, 심한 경우 나는 안되는 인간이나보다,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강물 속으로 뛰어든다. 그리곤 내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사람같으니까, 남들의 고통 따위는, 그들을 향한 동정 따위는 일체도 없다. 이기주의, 우울증, 자살.. 모든 것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비난하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기 위해서는, 아마 나 자신에 대한 치유가 먼저일 듯 싶다. 한국 사람들 중 정신병 없는 사람을 만나기가 더 힘든 듯하다.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을 듯 싶어도, 매일같이 나눠주는 자살방지 캠페인이거니 행복도 조사라거니 하는 당신은 행복한가요? 자신을 스스로 해쳐본 적이 있나요? 하는 질문에 그 누구도 매우 그렇다란을 새까맣게 색칠하기 때문이다. 그 검은 점은 누군가에게도 이가 내포한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자신만이 색칠한 그 검은 점, 작고 검고 깊은 강물 속 비춰지는 자신의 껍질없는 내면의 표정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나 자신과 모두를 속이고 나도 누군가를 공감할 여유없이 슬프게 살아가는데,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곧이곧대로 바라볼 수 있을까. 문제를 여러 개 틀려도 손톱이 바닥을 보이도록 물어뜯지 않고, 내 노력이 헛된 것 같을 때 참으려해도 밉게도 흘러나오는 눈물이 이제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서로의 곪아가는 아픔을 가지고 자신의 모든 시야가 가려진 채 평생을 홀로 외로이 아픔에 절여지지 않았으면. 여유가 없는 이 사회에서 무채색으로 물든 이 무표정한 세상 속 한 번은 웃음지었으면, 적어도 어제 먹었던 떡볶이가 맛있었음을 기억해주었으면. 죽고 싶다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결국은 나도 잘 살고 싶다는 의미라는 것을 모두가 알아줬으면 하는 소망을 써내려가 본다. 우리의 삶은 유한한 시한부와 다름이 없다는 걸, 그래서 하루하루를 의미있고 아까워서라도 알차게 살아야 할 것이라고. 영원할 것같았던 D-365가 빠르게 D-DAY가 되듯, 우리의 인생도 결코 길지는 않으니, 부디 조금은 솔직하게, 나의 약한 면도 드러낼 수 있고, 서로의 고통을 서로 공유하며 공감을 함께한 사람 대 사람의 치유가 가능한 사회가 오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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