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윤
요즘 세상을 보면 ‘누가 처음 만들었는가’보다 ‘누가 크게 키웠는가’가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처음의 열정보다 그것을 얼마나 빠르고 넓게 퍼뜨렸는가가 성공의 기준이 된다. 영화 파운더에서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의 혁신적인 시스템을 보고 단번에 가능성을 알아본다. 하지만 그가 매료된 것은 햄버거의 맛이 아니라 ‘속도의 질서’였다. 형제들이 ‘좋은 음식을 만드는 법’을 고민했다면, 크록은 ‘이 시스템으로 얼마만큼 확장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그는 형제들의 꿈 위에 자신의 제국을 세웠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현대 사회가 얼마나 빠름과 효율에 중독되어 있는지를 실감했다.
축구의 역사도 비슷하다. 처음에는 선수의 기술과 팬들의 열정이 경기의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돈이 팀의 운명을 좌우한다. 중계권, 스폰서십, 브랜드 계약이 경기보다 더 큰 뉴스가 된다. 돈이 많으면 최고의 선수를 사고, 이긴다. 그 결과 시장은 자본이 곧 실력이라는 새로운 표준을 만들어버렸다. 이런 구조 속에서 순수한 열정이나 이상은 설 자리를 잃는다. 효율적으로 돈을 돌리고, 더 빠르게 확장하는 팀이 ‘혁신적’이라 불린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혁신일까? 아니면 단지 돈이 만들어낸 착시일까? (나)의 글에 등장한 패러데이와 에디슨의 이야기는 그 물음에 대한 힌트를 준다. 패러데이는 세상의 이해를 뛰어넘는 호기심으로 전자기 유도를 발견했지만, 세상은 그를 외면했다. 대신 에디슨이 그 원리를 활용해 전구를 만들고 팔았다. 세상은 발명가보다 판매자를 기억했다. 에디슨은 “발명은 1%, 실행은 99%”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실행이 없다면 아이디어는 죽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문장을 온전히 동의하진 못한다. 실행이 99%라 하더라도, 그 1%의 방향성이 틀리면 아무리 완벽한 실행도 결국 잘못된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레이 크록의 이야기는 바로 그 잘못된 방향의 대표적 사례다. 그는 형제들의 시스템을 완성도 높게 확장했지만, 그 과정에서 창조자의 정신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그는 맥도날드를 “가족이 함께하는 공간”에서 “미국의 교회이자 상징”으로 바꾸며, 인간적인 철학보다 기업의 논리를 앞세웠다. 효율과 통제의 언어로 포장된 그의 성공 뒤에는, 누군가의 이상이 침묵당한 현실이 있었다. 나는 여기서 ‘효율’이 얼마나 쉽게 ‘폭력’이 될 수 있는지를 느꼈다. 효율이 목표가 될 때, 사람은 수단으로 전락한다. 물론 세상은 이상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실행은 필요하고, 구조는 중요하다. 하지만 진짜 혁신은 단지 잘 팔리는 구조가 아니라, ‘사람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 변화’여야 한다. 에디슨의 전구는 세상을 밝히기 위해 존재했지만, 레이 크록의 황금 아치는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세워졌다. 둘 다 실행의 결과물이지만, 그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 효율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나는 오늘날의 세상을 보며, ‘옳음’이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학교도, 기업도, 심지어 인간관계조차 “누가 더 빠르게, 더 많이 얻는가”의 논리에 지배된다. 하지만 진짜 가치는 속도보다 ‘의미’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패러데이의 무모한 실험은 당장 쓸모없어 보였지만, 결국 인류의 미래를 바꿨다. 반면 레이 크록의 냉정한 효율은 당대의 부를 만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한 시대의 윤리를 잃게 했다. 결국 혁신이란 단순히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세상과 나누는가’의 문제다. 나는 세상이 다시 한 번 속도보다 방향을, 성공보다 가치의 의미를 묻는 시대가 되었으면 한다. 효율은 발전의 조건이 될 수는 있어도, 정의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진짜 옳은 혁신은, 세상을 더 빨리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인간답게 움직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