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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 Jan 12. 2024

엄마의 인터뷰

이혼 대신 지루박

 엄마가 좋아하는 추어탕을 먹고, 따뜻한 커피 한잔하러 엄마 집으로 갔다. 평소에도 아빠, 외할머니, 외삼촌 등 당신을 아프게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엄마는 아무리 말로 끄집어내도 응어리가 다 풀리지 않는지 늘 처음 꺼내는 이야기처럼 화가 가득하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서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 혹시 누가 10년 전이나 20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냐고 하면 난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아, 소녀 시절로도 안 가고 싶어. 그때부터 다시 살라면 살고 싶지가 않아. 좋았던 때가 하나도 없어. 

 입술을 꾹 다물고, 미간을 찌푸린 채 단호하게 말했다. 좋았던 적이 하나도 없는 삶이라니. 내 가슴이 시큰거려 다시 한번 집요하게 물었다. "딱 하루만 돌아갔다가 다시 올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이나, 결혼 전이나, 엄마가 부자였던 홍천 사천리에 살았을 때는 어때?" ‘ㅁ’ 자형 기와집에 마당이 2개, 머슴도 있고, 집 안에 방앗간도 훈장님도 있을 정도로 부유했던 양반가 어린 소녀의 삶이라면 돌아가고 싶지 않을까? 내가 어린 시절 고왔던 추억 덕분에 힘들었던 시절을 버텨냈던 것처럼.


사천리 살 때는 내가 4살 때 화상을 입어서 얼마나 고달팠는지 몰라. 엄마가 동생 낳고 나흘 만에 있던 일이야. 엄마가 집에서 몸 풀고 있으니 옆집 살던 당숙이 ‘늬 어미 와서 밥 먹으라고 해라’ 그랬거든. 그날 비가 와서 신발이 젖으니 마당을 가로질러 가기 싫었나 봐. 부엌을 통해서 나간다는 게 화로에 옷이 걸려서 펄펄 끓는 솥단지가 그대로 나한테 엎어진 거지. 그때 입었던 옷 색깔도 기억이 나. 빨간색 옷에, 노랑 초록 색동 소매가 달려있었어. 옷을 빨리 벗기면 그렇게 심하지 않았을 텐데 다들 '어떡하냐 어떡하냐'하며 나를 빙 둘러싸고 보고만 있었어. 그때부터 12살 때까지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학교 끝나면 군부대 의무실에 다니면서 치료받고 그랬어. 막 덜덜 떨고 참으면서 치료했던 기억이 나. 

  4살 때 입었던 옷이, 그때 들었던 당숙의 말이 이토록 선명하게 기억나려면 육십이 넘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때로 되돌아갔던 걸까.. 몸서리를 치고 고개를 돌리는 엄마의 눈가가 촉촉하다. 왼쪽 겨드랑이부터 등과 옆구리, 팔꿈치까지 쭈글쭈글한 화장 자국이 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있던 흉터라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 어린 4살인 줄은 몰랐다. 그 시절엔 4살도 엄마한테 밥 먹으러 오라고 하는 심부름이 가능했구나... 


저번에 광명 시장을 갔는데 아빠가 요즘 군인 옷에 꽂히셨는지 가게 좀 구경하러 들어가자는 거야. 들어갔다가 몸이 덜덜 덜덜 떨려서 나왔잖아. 그 군대 막사 냄새가 아직도 기억이 나더라고. 그때 아프게 치료받았던 기억이 나서 집에 와서 며칠을 앓았어. 

 평생 족쇄처럼 붙어 다닌 그 화상 자국 때문에 지금까지도 밖에선 짧은 팔의 옷을 입지 않으신다. 더운 여름에도 칠부 소매로 흉터를 가리며 사셨다. 남이 보면 흉본다고..‘엄마.. 하나도 흉하지 않아’ 울음을 삼키며 무심히 내뱉듯 말해도 봤지만 엄마는 62세인 지금까지도 긴팔과 칠부를 입고 외출했다가 보는 눈이 없는 집에 와서야 후다닥 민소매로 갈아입는다. 


일을 얼마나 많이 했니. 들에 나가 일도 하고, 나 혼자 그 많은 식구들 밥하고, 빨래하고... 개울에서 물을 하루에도 열 번은 퍼 와야 돼. 벗어나고 싶어서 결혼했는데...

 증조할아버지의 노름과 사업으로 가세가 기울어 어느새 강원도 양구, 산골짜기까지 흘러들어 왔다. 이사 온 13살부터는 일만 하고 사셨단다. 시집간 언니, 장손인 오빠, 당신한테 '너'라고 불렀다는 세 살 어린 얄미운 여동생, 너무 어린 막냇동생들을 빼면 일할 사람은 당신뿐이었단다. 할머니의 물 떠 오라는 말을 다른 가족들처럼 무시할 수 없었던 건 흉터로 마음까지 쪼그라들어서였다. 누가 몸을 건드리는 것도, 마음을 건드리는 것도 소름 끼치게 싫어 제 몸만 더 고달프게 움직였다. 결혼하면 혼자 열이 넘는 식구의 밥과 빨래를 하는 것보다 더 고단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걸 21살 처녀가 상상이나 했을까. 땅도 없고, 시부모님도 안 계시고, 쌀도 없는 집에 시집와서 맞기도 많이 맞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밥하고 빨래하고 일하는 건 여전한데 끼니와 폭력까지 걱정해야 했다. 학교 갔다 오면 엄마가 가방을 들고 마구간에서 조용히 나를 불렀다. 엄마 손을 꼭 잡고 숨죽이며 술 취한 아빠를 피해있던 날들이 우리의 일상이었다. 


나는 일만 하고 고생만 하고 자라서 너네는 공주 떠받들 듯이 키웠지. 일할 줄 알면 나처럼 일만 하며 살까 봐, 일도 안 시키고, 아무것도 모르게 키웠어. 남의 집 잔칫집에 일하러 가서도 나는 내 새끼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먹게 하지 않았어. 가운데 떡하니 상 펴주고, 갈 땐 음료수까지 손에 쥐여주고 보냈지. 나는 이렇게 살아도 너넨 당당하게 대접받고 살라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라다를 퍼다 주고, 나갈 땐 주황색 환타 병을 손에 꼭 쥐어주셨다. 귀하게 대접받고 싶었던 당신 삶 대신 자식을 귀하게 대접하며 조금은 서러움이 풀리셨을까. 아침이면 운동화를 부뚜막에 올려 따뜻하게 데펴 주고, 추운 겨울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면 갓 구운 호떡을 쥐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호떡’이랑 ‘따뜻한 운동화’ 말고는 더 필요한 게 없었는데, 엄마는 힘들 때 꺼내볼 수 있는 그런 반짝이는 날들이 정말 하루도 없는 걸까.


내가 살아야겠다, 생각한 이유는 너밖에 없어. 나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너 하나야. 그러니까 내 거는 너 하나인 거야. 니가 얼마나 좋았겠니. 너를 위해선 다 참고 다 해도 됐지. 나는 뭐가 됐든. 

 나를 빤히 보시는 눈이 반짝인다. "엄마 눈 속에 내가 있어!! 내 눈에도 엄마가 있어?" 큰 발견이라도 한 것마냥 엄마한테 매달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세상에 둘만 있는 것처럼 살던 때를 떠올리고 계신 걸까. 

 반짝이던 눈동자의 빛이 사그라들었다. 긴 한숨을 쉬며,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신다.


- 내가 '인디언 썸머(2001년 개봉/박신양 ,이미연 주연)'를 보고 그렇게 울었잖아. 이미연이 남편한테 감금당해서 살다가 탈출해서 막 밖을 뛰쳐나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영화 있거든. 왜 돌아왔냐고 묻는 말에 '갈 곳이 없어서요'라고 대답하는데 내가 울었다니까. 내가 그랬잖아. 집을 몇 번이나 나갔었는데 그때마다 갈 곳이 없어서 되돌아왔다고. 나도 못 사는 사람한테 내 새끼들 두고 어찌 가나 싶어서 갔다가도 다시 돌아왔지. 

  엄마는 전기밥솥 사용법을 알려주고 나갔다. 고장 난 전기밥솥이라 취사 버튼을 무거운 전화번호부로 눌러놔야 밥이 됐다. 가는 엄마를 붙잡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빠는 엄마가 있든 없든 자식이 있든 없든 술만 있으면 상관이 없었다. 엄마가 담근 앵두 술을 병째 벌컥벌컥 들이키시고, 평상에 누워 두 다리를 뻗고 주무셨다. 우리 옆에 사는 외갓집도, 앞집에 사는 고모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었다. 아무도 우리를 보러 오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는데 엄마는 계속 되돌아왔다. 엄마가 와서 엄마 냄새를 맡고, 엄마가 해준 밥을 먹으면 좋으면서도 슬펐다. 엄마의 삶은 그대로일 텐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서. 

  나만 바라보고 사는 엄마가 마치 나 때문에 참고 사는 것 같아 내가 다 자라면 엄마가 이혼해서 자유로워질 줄 알았다. 아빠가 나한테 못해서 미운 게 아니라 내 엄마를 아프고 고통스럽게 해서 있는 힘껏 미워했다. 그런데 딸 셋이 모두 결혼한 지 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아빠랑 같이 사는 엄마는 무얼 붙들고 사시는 걸까. 


너네 다 결혼하면 이혼하려는 준비를 하긴 했었지. 근데 그때 딱 아빠가 퇴직했어. 사람들이 남편이 돈 안 벌어서 버린다고 흉볼까 봐 또 이혼 못했지. 이젠 기운이 없어 못해. 무릎 아픈 거 치료받는데 돈이 매달 몇 십이 들어가는데 내가 어디 가서 이 몸으로 돈을 벌어. 그리고 집도 이보다 작아질 텐데.. 더 초라하게 살긴 싫은 거야. ‘그 나이에 이혼하더니 저렇게 살 거 뭣하러 이혼했대’ 소리 들을까 봐.

  나이 65세에도 여전히 당신 삶이 실패인 것처럼 보일까 봐, 흠집나 보일까 봐를 걱정한다. 이제는 구박할 할머니도 호통치던 증조할아버지도 안 계신데 화상 자국처럼 흉한 거 다 가리고, 남 보기에 좋은 것만 드러내며 사신다. 물을 먹어도 고기 먹은 것처럼 이를 쑤셔야 하고, 점심 약속이 있으면 미리 허기를 달래고 가야 우아하게 밥을 먹는다고 나를 가르치신 것처럼. 술 마신 아빠한테 밀쳐져 무릎이 고장 난 건 생각도 않고, 무릎을 고쳐야 하니 이혼을 못하는 모순된 삶을 살고 계신다. 무릎이 다 나으면 그땐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 지루박을 잘 추고 싶어. 무릎이 아파서 추다 말았잖아.

 노천명의 ‘사슴’、윤동주의 ‘별’과 ‘자화상’을 외우며, ‘그리운 금강산’, ‘물망초’ 가곡을 즐겨 부르시던 문학소녀 같던 엄마에게 문화센터를 권했었다. 글쓰기도 노래도 아닌 춤을 배우겠다 하셨을 땐 고상한 엄마와 멀게 느껴졌지만, 무엇이든 배우며 남은 생을 조금이라도 즐겁게 사실 수 있다면 다행이니 응원했다. 스텝이 자꾸 꼬인다며 집에서도 열심히 연습을 하시더니 어느 날부턴가 콜라텍을 다니셨다. 90년대 청소년들의 공간이었던 콜라텍이 이제는 어르신들의 사교장이다. 지금은 무릎이 아파 쉬고 계시는데 무릎이 다 나으면 제대로 배워보고 싶단다. 오는 건 순 늙은이들뿐이고, 60대 젊은 여자 손 한번 잡아보려고 기를 쓰는 할배들만 있다고 욕을 퍼부으시면서. 아빠한테 못하는 분풀이를 할배들한테 다 쏟아내 듯 함부로 하신다. "지금 내 가방 바꿔주려고 가방 들어주는 거예요?" 톡 쏘며 면박을 주고, 춤 못 추는 할배들한텐 더 배워오라고 이제 갓 초급을 뗀 엄마가 큰 소리를 치신다. 할배들이 아닌, 나를 그렇게 살도록 억압한 남자들 외삼촌, 아빠, 증조할아버지에게 외치는 엄마의 작은 반항인 걸까. 


-지루박 추다가 잠깐 부루스 타임이 나오는데, 그걸 추면 허리가 꼿꼿해지는 게 내가 아주 우아해진 것 같어.

 ‘우아’라는 단어가 나오자 엄마의 표정이 소녀처럼 환해진다. 눈물로 얼룩진 삶에서도 시와 노래를 놓지 않고, 언제나 당신의 예쁜 사진에 목말라하셨던 것도, 이제 와 춤을 배우시는 것도 모두 우아해지고 싶었던 한 여자의 욕망이었다. 우아해 보이고 싶어 이혼도 못 하고, 부지런히 백조처럼 발을 버둥거리며 품위를 유지하고 계셨구나. 어쩌면 한평생 화상으로 울퉁불퉁한 엄마의 등을 꼿꼿이 세워줄 누군가의 손을 기다려온 건지도 모르겠다.


  아직 엄마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시간이 있어 다행이다. 우아하고 품위 있는 삶을 원하는 엄마를 위해 엄마와 단둘이 점심을 먹고, 곱게 화장을 해드리고 예쁜 곳에서 스냅사진을 찍어드린다. 작년 가을엔 갈대숲에서 사진을 찍어 드렸다. 엄마의 환한 웃음을 끌어내기 위해 농담도 해가며.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엔 온 가족이 다 같이 우아하게 가족사진을 찍어야겠다. 무릎이 나아 다시 콜라텍을 가시는 날 입으실 고운 치마도 하나 장만해 드려야겠다.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훨훨 스텝을 밟으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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