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訃告

by 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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訃告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우리 남매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사촌언니의 카톡을 통해 접했다.

이런 소식조차 아빠에게서 먼저 듣지 못했단 사실이 꽤 언짢았다.


손자, 손녀에는 우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의 아빠가 삼 형제 중 장남이라, 다른 자식들 이름보다도 제일 앞에 적혀 있었다.


우리는 <부조금을 내야 하나>라는 주제로 짧게 대화를 하다가

이내 직계가족은 부조금을 내지 않음을 깨닫는다.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말이다.

속으로는 이미 남이라고 정의한 게 분명하다.


나는 할아버지의 죽음에 아무런 감정 저항이 없었다.

살아있는 아빠를 만나는 게 더 우울한 일이었다.




아빠와는 음 할머니 장례식 이후니까 5년 만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일 년에 두 번 있는 명절 때 할머니네서 아빠를 만났다.

오빠가 운전을 하게 되니 우리는 각각 출발해서

할머니집에서 만나고, 각자의 집으로 헤어졌다.

이미 남이었다.


그동안 통화도 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거부감이 들었다. 그래도 꿈에서 한번씩 아빠를 보았다.


아빠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웃는 것도

나에게 아직도 10대 시절 사춘기 대하듯 말을 거는 것도

아빠가 표현을 못해서 일부러 최선을 다한 게 그 정도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꽤 오랫동안 아빠가 미웠다.




부고 소식을 들은 날,

오빠와 나는 한강을 달렸다.

삶을 부정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오빠를 삼일 중 하루라도 붙잡아 두고 싶어 그런 것도 있었다.

오빠는 다음날 아침 일찍 장례식장에 갔다.

나는 그가 걱정되었는데, 다행히 그는 가족들을 봐서 좋다고 했다.


오빠가 나타난 뒤에 아빠는 엄마와 내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와 나는 그날 새벽에 식장으로 향했다.


엄마와 아빠와 오빠가 한 프레임에 들어온 건 10년도 더 전의 일이라

이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퍽 묘했다.

기쁘지도, 그립지도 않은 것이

'아 우리가 원래 이랬지' 싶었다.


나를 기억하는 아빠의 친구도 있었는데,

그 아저씨의 딸 지수와 내가 친한 사이였다고 했다.

자꾸 나 때문에 지수가 정체성을 잃었다며 장난을 쳤다.

지수랑 나이는 같은데 내가 빠른 년생이라

학교를 먼저 가서

그때부터 정체성 혼란이 왔다나 뭐라나


막내 작은 아빠는

"주희야, 고마워."

라고 자꾸 이야기해 주셨다.

그 말에 너무 많은 세월이 묻어나서 마음이 아팠다.


둘째 작은 아빠는

우리는 같은 핏줄이고 가족이라며,

언제든 오고 싶을 때 오라고, 환영한다고 했다.

너희가 안 와도 좋고, 와도 좋으니까 언제든 오라고.


오빠는 올해 자신의 뿌리에 대해 연구하며

우리 선조가 선비였다는 둥 내게 설명한 적이 있는데,

우리 성씨(善山林氏)에 대한 혼란이 잔존했던 모양이다.

아마 작은 아빠가 해준 말 덕에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지 않았을까.

나 또한 위로를 받았다.

나는 다 자란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작은 아빠들은 그런 우리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는 더 큰 어른들이었다.




아빠를 언제 또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미 구부러진 마음,

관계를 회복하려고 애쓰고 싶지는 않은데.


이런 가족도 있고 저런 가족도 있는 거지.

결핍이란 단어가 9월을 자꾸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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