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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ll we?

by 쥬링

파타고니아 반팔을 툭 걸친 캐주얼한 아웃핏에 심플한 블랙 벨트, 미니멀해보이지만 디테일이 멋진 블랙 백팩, 차분한 향수의 질감과 얇은 은색 안경테까지. 그중에서도 제일 영국인스럽다고 느낀 건 단연 블랙 옥스퍼드화다. 준호를 처음 만난 건 언어교환 모임에서 였다. 주체 측에서 총 세 번의 테이블 랜덤 매칭을 돌렸는데, 나는 두 번째 테이블에서 그를 만났다. 우리는 각자 자신을 표현하는, 최근 있던 일 등 인화한 사진을 한 장씩 가지고 있었고, 옆 사람과 서로의 사진을 보고 사진의 첫인상을 쓰는 시간이었다. 재밌는 아이디어였다. 나는 준호의 사진을, 준호는 나의 사진을 교환했다. 그는 알아보기 힘든 필기체로 빼곡히 소감을 채웠고, 나는 다른 사람들도 사진 뒷면에 글을 남길 줄 알고 한쪽 귀퉁이에 단어 하나를 적었다. '인플루언서?!' 흔히 외국 영화에서 볼 법한 졸업파티 비스무리한 장면에 그가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꽤 있었지만 영어로 적어내기 어려워 최대한 한 단어로 첫인상을 담아내었다. 그는 내가 적은 '?!' 이 표현에 유독 호기심을 가지며 웃었다. 인플루언서는 살면서 처음 들어본다고. 파티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다 인플루언서다(?). 나한테는 조금 그렇다. 나는 당시에 설악산에 끌려가 1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산행을 했던 경험이 강렬했었기에 등산을 할 때 찍은 발 사진(하산길에 계곡이 있어 양말을 벗고 짐을 다 내려놓고 바위 위에 서서 맨 발을 찍었었다.)을 가져갔다. 그는 나의 사진을 보고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사진의 표면을 넘어선 해석으로 글을 적었다. 모험심이 강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나는 그 말이 참 좋았다. 짧은 시간에 단편을 보고도 깊은 사유가 가능하고, 그 조각들을 엮어 글로 써낼 수 있는 사람이란 점에 자연스럽게 호감이 갔다. 그리고 나는 목소리에 참 약한 사람인데, 그는 목소리도 좋았다. 내가 그에게 "너 목소리가 진짜 좋다!"라는 칭찬을 했던 기억이 있을 정도로. 나는 그의 억양을 통해 영국을 잠시 여행했을 때보다 '영국 발음의 매력이 이런 걸까'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짧은 모임 이후에 나는 그를 한번 더 만나보고 싶어서 연락을 했지만, 지난여름은 나의 마음이 연약했던 시기였기에 그를 선뜻 볼 수 없었다. 나는 사람을 만날 때면 에너지를 너무 많이 쏟아내서, 그만큼 내가 상대방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면 차라리 만남을 갖지 않는 것이 옳다고 믿는 편이라 그랬다. 나는 9월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묻고 싶다. 다시 만난 그와 나의 이야기를 읽고 이후의 어떤 사건이 전개되길 기대하는지, 같은 날을 보내고 같은 시간을 나누었지만 누구의 관점으로 이야기가 풀어지면 재밌을 것 같은지. 아직은 기승전결의 시작과도 같은 이야기라 조심스럽기만 하다. 짧게 요약하자면 나는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중간 즈음부터 포기했고, 아는 단어도 발음 때문에 못 알아듣기 시작했고,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는 데 있어서 정보 불균형이 생겨 버렸고, 나는 최근에 영국 드라마인 소년이 온다를 정말 인상 깊게 보았음에도 그 작품이 영국 드라마로 머릿속에서 분류가 되어 있지 않아서 그에게 영국 드라마를 본 게 브리저튼밖에 없다고 했고, 클라이밍을 정말 해보고 싶었는데 클라이밍을 다닌다는 그에게 나도 클라이밍장에 데려가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음 나의 관점에서는 그 정도 전개가 있었다. 이성적인 만남이 아니라, 사람대 사람으로 만났다는 부분이 독특한 서사 구조로 작용할 것 같고, 친구로서 그가 나에게 호감을 느꼈을지는 서스펜스 장르에 속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의 제목을 Shall we?로 붙인 건, 또 뭐랄까. 장르의 변주 가능성을 열어뒀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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