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솔직함=좋다

by 쥬링

당시에는 그 상황을 피하기 위해 거짓을 얼버무렸다. 부끄럽기만 했다. 한동안 나를 자책했다. “모자란” 나라는 감정에만 사로잡혔다.


마음이 좀 답답한 날들이 있다. 나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하는 여러 가지 루틴이 있는데, 케케묵은 답답함을 풀기에는 산이 좋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어릴 적 외할머니네서 잠에서 깬 시간 같달까. 강원도 대관령 대기리. 할머니가 마포 집을 청산하고 노후에 통나무집을 짓고 외롭게 살다 간 마을. 나는 그곳에 어린 시절 추억이 참 많다.


산에 가고 싶다. 혼자 가기도 하는데, 어쩌다 몇 번 함께 산에 오른 분이 생각났다.(등산 이후 안부 연락이 와 잠시 대화하다가, 이 더운 날에도 매번 산에 오른다기에 나는 계절 바뀌어야 다시 할 것 같다고 말하니, 그럼 계절 바뀔 때 다시 산에 가자고 물어보겠다던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 이번 주에 산을 갈 계획이 있냐고 머릿속으로 먼저 묻는다. 그와 어떤 얘기가 오갈지 상상하다가 나의 현재 모습을 또 피하듯 얘기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얽혀있는 관계 때문에 나는 솔직해지는 것이 두렵다.


나를 오래 알고 지낸 루나는 알 것이다. 내가 얼마나 솔직한 사람인지. 아마도 그녀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솔직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건네준 친구일 것이다. 중학생 때였다. 나는 그녀가 그린 그림을 많이 좋아했고, 그녀는 나의 피드백을 반짝반짝한 눈으로 곧잘 들어주었다. 남들은 다 잘 그렸다고만 하는데, 내가 이 부분은 이게 아쉽다 같은 말을 해줘서 좋다고 해줬던 것 같다. 그때부터 나는 솔직함=좋다는 의미가 삶에 성립되었다.

진솔한 게 매력인 내가 솔직해지는 것이 두렵다니. 나는 단단히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등산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자정이 넘은 시간에 머리를 말리며. 카페인에 매우 취약한 내가 스타벅스 마케팅에 못 이겨 커피를 두 잔이나 마신 날에. 그로 인해 자기 전 루틴이 몇 시간씩 뒤로 밀려난 하루 안에서. “나는 솔직한 사람, 솔직해야 내가 사는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리 붙이면 직장인, 저리 붙이면 대학생, 또 다른데 붙이면 사업가, 뒤집어 보면 이제는 작가 지망생까지. 하나를 말하는 순간 다른 것을 감추게 되는 게 사회생활 같기도 하고. 나를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손에 꼽아서, 나는 그 친구들을 보면 유독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제는 솔직함이 편안함에 이르렀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사람들은 내가 어떻든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텐데. “어떻게 그 자리에 갔어?”, “어떻게 그 사람을 알게 됐어?”, “어떻게 이 일을 하고 있어?” 그놈의 어떻게 라는 질문 뒤에 오는 리액션이 하나 같이 부럽다, 좋겠다였어서 나 스스로 솔직해질 수 있는 순간을 억제해 왔다. 내가 쟁취한 기회와 타인이 제안한 기회를 낚아챈, 같은 쟁취지만 결이 좀 다른, 그래서 벽처럼 느껴지는 그런 것이 알게 모르게 있곤 했나 보다. 삼촌은 그 또한 네가 잘해서 얻은 결과이니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다고 말해줬지만 나의 자존감은 이미 하강 중이었다. 그래서 일을 하다 만난 사람들에게는 대학생 신분을 숨겼고,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일을 하고 있음을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 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저 솔직하면 될 것을.


나는 무슨 일을 하고 무슨 환경에 놓였는지는 처음 알게 된 이후에 크게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겠다. 그보다는 어떤 취향을 가졌는지,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어떤 자세로 삶을 대하는지가 더 궁금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질감이라는 것 때문에 마음이 더 쏠리거나 한걸음 물러나게 되는 것들은 있겠지만. 혹시 그것 때문에 내가 두려움을 느낀 것일까. 다르면 좀 어때. 쿨하고 싶다.


나는 그와 산에 오르게 되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내게 그런 용기가 생길까?

아직은 아마 묻지 못할 것 같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광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