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내향인의 주섬주섬 여행줍기
블루투스 이어폰을 다시 꽂고 싶지는 않았다. 현실에 깊게 집중할 수 없을 때 꺼내 듣는 음악은 감정을 기만하는 일 같았다. 습관처럼 귀에 꽂은 음악은 저마다 용도가 있었을 뿐 마음을 울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약속 없는 저녁에는 그저 빈 공간을 메우는 용도로 아무 음악이나 듣는다. 운동을 해야 할 때에는 직설적인 가사가 듬뿍 담긴 랩 음악이 운동의 동기를 자극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퇴근길 버스에서 듣던 음악은 업무 모드에서 빠르게 빠져나오기 위함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틀어둔 노래는 그저 어떤 상황을 모면하는 수단이었다. 그런 '효용성 음악'을 여행지에서마저 사용하는 것은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한 모금 들이켜면 기분을 즉각 상기시켜 주는 액상과당 마냥 음악을 활용하던 습관을 고치고 싶었다. 그래서 한동안 이어폰을 사용하지 않았다. 덕분에 새로운 광경을 창밖의 풍경처럼 흘려보내지 않을 수 있었다. 풍경 앞에 선 마음은 육수에 식초 몇 방울만 떨어뜨린 평양냉면처럼 나직하게 스며왔다. 굳이 안 들어도 되는 음악 대신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는 편이 더 쏠쏠한 재미가 될 때도 많았다. 이따금 침묵이 지겨우면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마음속 고요를 찾기 위한 노력은 그렇게 한 달을 버티다 끝을 맺었다.
어느 날 나는 기계가 주는 손쉬운 행복에 다시 손을 대고 말았다. 음악의 순기능을 합리화하면서 중독자처럼 이어폰을 꽂아 듣기 시작했다. 보사노바 리듬이 주는 편안함은 무더위의 에어컨처럼 달콤했다. 초점이 흐려진 눈을 하고 골똘한 생각에 잠긴 척 어디든 걸터 않으면, 귓속에선 누군가 따뜻한 톤으로 기타를 연주한다. 들릴 듯 말 듯하게 읊조리는 가사는 원하는 노랫말만 골라 들어 내 멋대로 상상해 보는 재미가 있다. 후렴구에 스친 '내 사랑'이란 구절만으로도 그 노래는 절절한 사랑 노래가 된다. 나는 수십 가지 형태의 사랑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한낮의 단꿈을 꾼다.
그렇다. 어디서든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아이폰이 세상에 나온, 인류애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나는 어설픈 자연주의적 생활 패턴을 접고 다시금 디지털 기기에 손을 댄다. 송충이 솔잎 먹듯 노래만큼은 마음껏 듣기로 한다.
전과 달라진 점은 딱 하나, 노래가 좋게 들리지 않을 때면 바로 꺼버리기로 했다. 상황과 기분에 맞는 노래 몇 곡을 라이브 음악 청해 듣듯 소중하게 감상하기로 했다.
음악은 전혀 없는 감정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어지러운 환경 탓에 좀처럼 피어오르지 못한 감정을 북돋워준다. 트이지 못한 생각의 꽃봉오리 끝부분만 살짝 다듬어 이내 피어오르게 한다. 음악의 이러한 요소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무념하게 창밖을 바라볼 때 생각이 더 잘 떠오르는 것처럼, 나의 무드와 맞아떨어진 음악은 생각의 파장을 오래 지속되도록 만든다. 그리고는 자칫 세상에 태어나지 못할 뻔했던 글과 행동들을 탄생시킨다.
음악에는 소리의 사정거리에 속하는 모든 공간을 하나로 아우르는 힘이 있다. 음악은 땅의 소유자들이 촘촘히 나누어둔 벽을 관통한다. 소리의 파동은 측량 기사들이 애써 그어둔 필지의 경계를 무시한다. 그리고는 '음악으로 인해 마음이 동하는 사람들'을 공간의 새로운 기준으로 삼는다. 곧 수십 명의 소유자가 문서로써 남겨둔 제도의 역사를 단 번에 전복한다. 같은 음악에 감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공간에 있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음악이 들려오면 제각기 놀던 사람들의 다단한 마음은 몇 가지 감정선 위에 차곡차곡 정리되기 시작한다. 음악에 함께 집중하는 사람들은 말없이도 서로의 감정을 이해한다. 음악 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이다. 우리는 해변에서 Tom Jobim의 wave를 듣는 동안에는 적어도 상대의 직업 따위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누군가 나와 같은 리듬에 맞추어 고개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울 따름이다.
음악의 기적적인 요소는 자연히 나에게 좋은 카페와 음식점을 고르는 지표가 되었다. 가게의 입지와 분위기에 맞는 플레이 리스트를 갖는 것은 생각보다 고난도의 과제이다. 그에 비하면 음식의 맛과 서비스는 다분히 공학적인, 저난이도의 과제에 속한다. 흘러나오는 음악으로부터 주인장의 성격과 철학,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유튜브 리스트를 그대로 가져와 재생하는 사람은 아마도 하루 한 번만 가게에 나와 직원들의 실적을 정산하고는 영혼 없이 떠나는 사장에 가까울 것이다. 분위기와 상반되는 자신만의 리스트를 고집하는 사람의 커피는 아마도 좋은 원두를 사용함에도 정작 물과 커피의 비율을 맞추지 못하는 등의 기본적인 요소를 놓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분위기와 인테리어, 들어찬 손님들의 나이대를 고려하여 그와 찰떡인 음악을 틀어두는 사장은 고객이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까지 서비스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플레이 리스트라는 고난도의 과제가 선결된 가게에서 내놓는 커피는 결코 맛없을 리가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니 플레이 리스트를 잘 짜두는 카페를 좋은 가게의 지표로 삼으면 나머지 모든 부분이 덩달아 충족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배경으로서 '좋은 음악'은 분위기에 걸맞는 정도로 결정되는 것 같다. 공간의 여러 요소가 음악과의 궁합에 영향을 미친다. 바닥의 색깔이 모래사장의 금빛인지, 콘크리트의 회색빛인지, 아스팔트의 검은빛인지에 따라 틀어야 할 음악의 톤도 변화한다. 더불어 벽지의 색깔, 주로 손님을 받는 시간대가 낮인지 밤인지, 의자의 소재가 플라스틱인지 나무인지도 선곡에 영향을 준다. 예로 나무 소재가 많은 공간에는 정말 나무의 소리를 내는 색소폰 같은 목관 악기나 클래식 기타 음악이 어울린다. 반대로 금속을 인테리어 소재로 활용한 가게에는 금속처럼 까랑까랑한 현악기나 트럼펫 소리가 잘 어울린다. 실내 조도는 악기가 내는 소리의 진동수와 비례해야 좋다. 밝고 산뜻한 실내에는 낭랑한 피아노 소리가, 어둡고 음침한 바에는 드럼이나 신디사이저로 찍은 저음의 비트가 어울린다. 자신이 의도한 공간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그에 걸맞은 음악을 선곡할 줄 아는 사람이 만든 음식과 커피가 맛없을 리 없다.
플레이 리스트 만들기는 예능에 취약한 내가 할 수 있는 취미 중 유일하게 감각적인 일이다. 악기처럼 수려하게 연주하지는 못해도 어설프게나마 의도한 분위기를 펼쳐 보일 수 있는 영역이다. 스케치와 채색까지 이미 잘 만들어진 곡들을 내 식대로 버무림으로써 비교적 손쉽게 원하는 분위기를 창조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특정 분위기와 잘 어울리도록 만든 플레이 리스트는 나만의 장소를 떠올리게 만든다. 2010년대 유행하던 '인디밴드 음악'으로 꾸린 리스트는 방황하던 스물셋의 골목길을 연상하게 한다. Joao Gilberto의 고즈넉한 보사노바에서는 잔잔한 파도 소리를 되새긴다.
여행 중 좋아하는 장소가 나타났다면 두세 번은 같은 곳을 찾아 그와 어울리는 리스트를 만든다. 선곡은 아주 보수적이고 까다롭게 진행되어야 한다. 한 번 칠하면 다시 지우지 못하는 물감처럼 신중을 기한다. 몇 년 뒤에 나는 오로지 그 색감에 의존하여 지금의 기억을 떠올리려 할 것이다. 해변에 외롭게 매인 나룻배, 조금은 흐린 하늘, 모래사장에서 낮잠을 자는 강아지. 이 모든 걸 설명해 줄 수 있는 음악들을 찾아 고른다. 파스텔톤의 환상 속 바다가 아닌 지극히 현실적인 바다, 그러나 모든 게 만족스러운 상황을 묘사하는 노래.
플레이 리스트를 들려주는 일은 상대를 내 상상 속 공간으로 초대하는 일이기도 하다. 혹은 경험하지 못한 누군가의 마음에 절실히 공감을 시도하는 일이기도 하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가장 좋았던 일은 직접 만든 그날의 플레이 리스트를 손님들에게 들려주는 것이었다. 어느 날은 50대 아저씨가 눈을 감고 있길래 이문세와 정훈희의 명곡을 틀어주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미간을 찡긋하며 별안간 무언가를 느끼는 듯 반응했다. 나는 그의 삶을 모르지만 그간 일을 하며 느꼈던 고충을 수십 배로 농축한 듯한 어른의 고뇌를 상상할 수 있었다. 음악이 끝난 뒤 그는 "잘 쉬었다 갑니다."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나는 플레이 리스트만큼 용이한 소통 방법을 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했다.
저마다 잘 읽히는 책이 있는 것처럼 음악도 누구에게나 가슴 깊이 박히는 장르가 있다. 상황에 따른 좋은 노래가 이미 스탠더드화되어 있거나 AI 추천 리스트가 매번 다르게 업로드되기도 한다. 하지만 직접 만든 리스트에는 개인의 삶과 질감이 드러난다.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그윽함이 배어있다. 일기나 에세이가 예술의 영역이라면, 단어의 개수보다 많은 음악으로 재조합된 리스트는 독창적인 하나의 문단쯤은 되는 셈이다. 나는 아마도 좋은 장소의 기억만큼이나 개인적인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게 될 것이고, 그것은 훗날 시공간을 초월해 누군가를 초대하는 데 쓰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