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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양 May 21. 2023

17년 만에 출소합니다

엄마들만 이해하는 육아이야기

"왜 울어? 슬퍼? 엄마가 계속 집에 있으면 좋겠어?"

아이는 두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아래로 빼죽하게 내려간 입술을 실룩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집에 있는 지금도 너는 일어나자마자 준비하고 학교에 갔다가 오후 늦게 집에 와서 한두 시간 후에 저녁을 먹고, 또 한두 시간 후에 샤워하고 양치하고 자러 가잖아. 엄마랑 마주 앉아 있는 시간은 다 합해서 한 시간도 안될걸?"


예상치 못한 아이의 눈물에 당황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살짝 서운한 마음도 들어 나름의 항변을 해 보았으나 다 하릴없는 이야기다. 아이도 나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란 걸 왜 모를까. 산술적으로 엄마와 마주 앉아 있는 시간을 계산해 내어 아이에게 대거리나 하고 있는 유치한 모습에 스스로에게 정나미가 떨어질 지경이었다.


나는 17년째 전업주부다. 큰아이는 만 16세. 작은아이는 만 11세. 결혼과 임신이 동시에 진행된 이래 누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닌데 퇴사를 하고, 남편을 따라 이 머나먼 땅으로 건너왔다. 막장 드라마처럼 시어머니가 '당장 일 그만두고 남편 뒷바라지나 잘하라'라고 했거나, 서울에서 잘 살고 있는 나를 손발 꽁꽁 묶어 보쌈이라도 해서 영국에 데려왔다면 오히려 나을 뻔했다. '이게 다 당신들 때문이야! 잃어버린 내 청춘 돌리도!' 하고 울분을 토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분명 결혼도, 퇴사도 그리고 이제까지의 내 삶을 모두 뒤로한 채 남편 하나만 보고 영국으로 이주를 한 것도 전부 다 내 결정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나의 머리와 가슴은 17년 동안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는가 보다.





대학 3학년에 통역사의 꿈을 키우며 통대 입시학원에 다녔다. 저녁은 신촌 길거리에 즐비한 떡볶이 포차에서 대충 때우며 '찍찍이'라 불리던, 당시 예비통역사들의 필수품이었던 카세트 레코더를 보물처럼 끼고 다니며 '나는 꿈을 꾸는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만족스러웠던 그런 때가 있었다.


마침 내가 다니던 대학교 근처에 통대입시학원이 생기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청강하러 들어갔던 날에 하필 당시 나의 관심분야였던 미국의 힙합가수 RUN DMC에 대한 기사를 틀어주신 바람에, 기사 내용이 귀에 쏙쏙 들어와 나도 모르게 입으로 중얼중얼 한 바람에, 당시 나의 우상이었던 동시통역사 강사님이 나를 지목해 발표를 시켰고 나는 '저는 청강인데요'로 시작해 마이크를 잡고 발표를 했다. 그날 들었던 기사가 경제나 정치분야였으면 나는 그날 학원 등록을 안 했을지도 모른다. '할 수 있겠다'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갖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게 청강생 신분으로 칭찬을 듣고 자신감이 생겨 학원을 등록하고 입시생이 되었다.


당연히 공부는 어려웠고, 줄줄이 낙방하는 선배들을 보며 현실과 꿈의 거리가 지구와 태양만큼 멀게 느껴졌다. 한 번에 붙는 것은 거의 기적처럼 보였고 마치 고시공부를 하듯 몇 년째 도전하는 스터디 멤버들을 보며 위기감이 들었다. 나는 한 번에 해내야 하는데 그러기엔 나의 실력도 정신력도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매일 느꼈다. 당시에 나는 부모님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아서 어떻게든 하루빨리 출가를 해야 했기에 집에 붙어있으면서 대학원을 재수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집에서 멀어지기 위해 대학도 지방으로 가려했던 나였다.


나는 감정적인 사람인 동시에 현실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위험감수를 잘하지 않는다. 대학교 원서를 쓸 때에도 단 한 군데도 상향 지원을 하지 않아 네 군데 전부 합격했을 정도다. 안타깝게도 나는 늘 혼자라고 느끼며 자랐고, 비빌언덕 따위는 없다고 느꼈기에 실패를 할 여력이 없었다. 한 번에 해내야 했다. 뭐든지 한 번에.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며 취업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이거라도 해보지 뭐' 하며 지원했던 첫 회사에서 보기 좋게 낙방했다. 어찌 보면 인생에서 첫 번째로 실패를 한 순간이었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 나는 늘 안전한 선택만 하며 살았다는 것을 지금에야 깨닫는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그냥 막연하게 나는 회사 생활을 잘할 자신이 없었다. 사무실로 출근하는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승무원이었다.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아도 되고 자유롭게 비행기도 탈 수 있고, 또 보기에도 뭔가 있어 보이지 않는가. 철이 없고 근거 없는 자신감만 가득했던 이십 대 초반 나로서는 통역사에서 승무원은 눈을 한참 낮춘 것처럼 생각되었고 그래서 내가 지원만 하면 어디든 갈 줄 알았다. 자신만만하게 지원했던 첫 항공사에서 서류전형부터 떨어졌을 때에도 나는 그저 황당해할 뿐이었다. '네가 뭔데 나를 떨어뜨려?' 황당무계한 도도함은 어디에서 왔을까.  


평생 피해 다니던 실패를 한꺼번에 경험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만만하게 생각했던 승무원이 갑자기 에베레스트산처럼 높아 보였다. 두 번째 지원한 항공사에서는 면접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면접 경험이 전무했던 나는 '자신의 단점이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에 순도 백 퍼센트의 정직한 나의 단점 리스트를 늘어놓았다. 당연히 불합격이었고 그제야 나는 그동안 얼마나 진짜 세상과 단절되어 살았던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당시 나에게 키다리 아저씨와 같은 존재였던 친엄마가, '잘 모르는 것은 배우는 게 맞다'며 승무원 학원을 가보라고 하셨다.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던 나는 면접 팁이라도 얻어보자는 심산에 강남에 있는 승무원 학원에 등록을 했고 그곳에서 승무원이 지상최대의 소망이며 인생최대의 목표인 수많은 예비 승무원들을 만났다. 한 번도 무언가를 그렇게 갈망해 본 적이 없는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전국에서 7명 만을 선발하는 외국항공사 기내 통역직에 합격하였고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짧고, 너무 달콤해서 정말 그런 시간이 있었나 싶은, 최고의 2년을 보냈다.


통역사가 못 될 것 같아 차선으로 도전했던 승무원일에서 우연히 또 다른 기회를 잡게 되었다. 내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서 출발한 비즈니스석 승객을 우연하게 런던으로 가는 연결 편에서 옆자리 승객으로 만난 것이다. 나는 지금도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그때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나를 단번에 알아보았지만 나는 그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었다.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한 시간여 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끝에 회사 임원이었던 그가 나에게 파트타임 통역일을 제안했고 그렇게 3개월 예정으로 시작한 통역일을 1년 동안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돌아보면 삶의 구석구석에서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인생의 항로를 바꾸어 버리는 그런 선택을 한다. 당시에는 알지 못하는 순간의 선택이 나중에 가서야 엄청난 사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런던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때 옆자리 승객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더라면, 그때 통역일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때 태풍 '나비'때문에 서울로 올라가는 비행기가 취소되지 않았더라면 울산에서 발이 묶여 젊은 엔지니어들이 모여 저녁을 먹는 자리에 초대되어 남편을 만난 일도 없었을 거다.


재미있는 것은 시간이 흘러 돌아본 그 중요한 선택들이 현재의 결과에 따라 좋은 선택 혹은 나쁜 선택이 된다는 거다. 남편과 사이가 좋으면 우리는 '태풍이 맺어준 인연'이 되고, 남편이 꼴 보기 싫을 때는 '그놈의 태풍 때문에 인생이 꼬였다'가 되니 말이다. 우리의 결혼생활은 태풍 덕분이었다가 태풍 때문이었다가를 왔다 갔다 하며 18년째 이어지고 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유럽여행의 필수코스인 런던을 잠깐 거쳐가는 것 말고는 잘 알지도 못했던 영국이란 나라로 만삭에 가까운 몸으로 이주를 하면서도 나는 별 생각도 별 걱정도 없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철이 없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결혼이라는 것의 의미도, 부모가 된다는 것의 의미도, 외국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도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았었다. 하긴 생각이 많았다면 쉽게 할 수 없는 결정들이었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결혼도, 아이도, 해외살이도 뭐 하나 쉬운 게 없는데 그걸 한꺼번에 겪었으니 우울증이 오지 않으면 그게 비정상이다 싶다.


시부모님은 우리가 살던 첫 집에서 20여분 떨어진 곳에 사셨다. 하지만 남편도 나도 독립적인 성격이라 아이를 키우는 데 있어 도움을 거의 받지 않았다. 독립적일 수밖에 없던 이유도 있기는 했다. 이건 남편의 가슴에 영원한 상흔을 남긴 아픈 기억이 된 일인데, 큰 아이의 임신을 알게 된 직후 남편이 영국에 계신 시어머니에게 전화로 소식을 전했단다. 그런데 그때 시어머니가 당시 임신도 하지 않았었던 시누의 아이를 봐주기로 시누이와 이미 약속이 되어 있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했단다. 물론 내가 직접 들은 것이 아닌지라 정말 그러셨는지 알 수는 없으나 남편은 그 일로 크게 서운하여 어려서부터 있었던 질투심, 애정결핍에 더해져 나중에는 여동생을 보는 것조차도 힘들어 한국행을 다시 감행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달콤한 신혼도 없이 초보 엄마, 아빠가 된 우리는 연습게임도 없이 프로 리그에 던져진 것처럼 모든 시행착오를 정면으로 돌파해야 했다. 정말 맵고 짜고 눈물 콧물 쏙 빼는 불닭소스 같은 시간이었다. 남편은 부양해야 할 가족이 생긴 책임감에 적응해야 했고 나는 눈에 넣을 수만 있다면 넣고 다니고 싶게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밤만 되면 내 영혼을 갈가리 찢어버리려고 지옥에서 보낸 게 아닐까 싶게 울어대는 통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정상과 비정상 그 어딘가에 정신을 두고 살았다.


예정일을 일주일 넘겨 유도분만으로 품에 안은 아이는 그동안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서 얼굴에 주름도 하나 없고 풍성한 머리숱에 크고 동그란 예쁜 눈을 가진, 믿을 수 없이 예쁜 신생아였다. 첫날밤 병원에서 아이를 바라보며 들었던 생각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이렇게 무섭도록 사랑할 수가 있지?' 그리고 그 생각은 나중에 '이렇게 소중하고 예쁜 아이를 두고 어떻게 떠날 수가 있지?' 하는 생각으로 번지며 내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친엄마에 대한 몰아치는 원망과 함께 산후우울증을 몰고 왔다. 그러니까 나의 기나긴 우울의 역사는 공식적으로는 첫 아이 출산 후에 찾아온 산후우울증이 시작인 셈이다. 그 아이가 이팔청춘 만 16세가 되었으니 나는 17년 경력의 우울증 환자이자 전업주부다.


둘째 아이가 우리가 그렇게 바라던 집 근처 가톨릭 학교에 배정이 되자 좋은 학교에 가게 되었다는 것, 중, 고교 모두 한 학교에서 다닐 수 있다는 안도와 걸어서 다닐 만큼 가깝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뻤다. 그래서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둘째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는 9월부터 나는 더 이상 '스쿨런', 아이를 등하교시키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더 이상 내 하루를 등교와 하교 사이에 가두어 두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안 보이던 눈이 뜨이듯이 생각이 떠올랐다. 맞아, 나는 더 이상 스쿨런을 하지 않아도 돼. 나는 이제 스쿨런으로부터 자유야. 나는 이제 자유야! 나는 자유야!


왜 그 생각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을까? 아이가 집에서 가까운 좋은 학교에 가게 된 것만 중요했지 그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되는지는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이제 17년 만에 처음으로 나의 24시간을 나를 기준으로 계획해도 되게 되었다. 물론 하루아침에 아이들을 나 몰라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내 삶에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이 자유로움은 한국에 계신 작은어머니와 전화통화 중에 나도 모르게 자유를 선언하게 만들었다.

"저 17년 만에 이제 자유예요. 17년 하니까 엄청 긴 시간 같고, 좀 엉뚱하게도 도대체 무슨 죄를 지으면 17년형을 받는지 갑자기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러니까 이게, 17년 만에 출소하는 기분이에요! 하하하.."


나의 자유를 깨닫고 나서 신이 나서 자랑을 한 거였다. 둘째 아이를 앞에 세워두고 엄마는 이제 집에 붙어있지 않아도 된다, 엄마는 이제 회사를 다녀도 되고, 다시 비행기를 탄다고 해도 그게 이제는 가능해진 거다, 엄마는 이제 자유야! 평소 나의 기쁨을 함께 기뻐해주고 표현도 잘해주는 둘째 아이인지라 나의 다시 찾은 자유를 함께 기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입이 축 쳐지자 당황스럽고 뭔가 억울하기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내가 얻은 이 자유라는 것이 어찌 보면 그 녀석으로부터의 자유인 셈인데 그것을 본인 앞에서 기뻐하다니. 마흔을 넘긴 나이에도 나는 여전히 철이 없구나.


2023년 9월. 둘째 아이가 중학교에 간다. 걸어서 간다. 2023년 9월에 천지가 개벽하지 않을 수도 있다. 2022년 9월과 별반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기대를 해본다. 9월에 둘째 아이는 중학교에서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고 스쿨런에서 탈출한 나도 새로운 문 하나쯤 열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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