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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르티아 Feb 21. 2022

공화국은 어떻게 몰락하는가

| 역사책 읽기 - “폭풍 전의 폭풍”

최근 미국 경제의 전망에 대한 책들을 찾다보니, 문득 로마 역사에 대한 관심이 들어 책을 한 권 골라 읽게 되었다. 제목은 "폭풍 전의 폭풍", 역사 전문 팟캐스트 제작자인 마이크 덩컨이 생생하게 그려낸 로마 공화정 몰락기이다.

이 책의 가치는 많은 로마 역사서나 소설과 달리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키케로, 옥타비아누스가 활동하던 본격적 격변기인 BC 3~40년대가 아닌 그 이전 약 100년간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는 점에 있다. 저자는 로마가 포에니 전쟁으로 카르타고를 꺾고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한 바로 그 시점부터 로마 공화정 몰락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조금 거칠게나마 그 몰락의 패턴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1. 공화국의 확장과 번영은 필연적으로 경제적 양극화를 불러온다.

2. 양극화는 부의 재분배에 대한 대중들의 요구로 이어진다.

3. 대중들의 요구에 신진 엘리트층이 부합하면서 공화국 내의 제도개혁 움직임이 싹튼다.

4. 기득권 계층은 제도개혁에 대한 열망을 포퓰리즘으로 낙인찍고 진압한다.

5. 개혁이 지체되면서 기성 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환멸과 불신이 강해진다.

6. 갈등은 장기간의 내전으로 이어지고, 대중들은 질서를 갈망하게 된다.

7. 결국 기득권을 제압하고 재분배를 주도하는 주인공은 공화국 외부의 존재, 즉 독재자가 된다.



기원전 146년, 로마는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불에 탄 카르타고의 폐허에는 소금이 뿌려지고, 로마는 지중해의 최종 패자가 되었다. 하지만 넓어진 영토에서 쏟아지는 전리품과 노예들은 한줌의 원로원 귀족들의 손에 들어갈 뿐이었다. 정작 로마를 위해 피를 흘린 퇴역군인들은 긴 군복무로 농사를 망쳐 부자들에게 땅을 팔고 농노가 되었다. 도시로 이주하더라도, 식민지에서 쏟아지는 수십만의 이민족 노예들에게 일자리를 뺏기기 일쑤였다.

이러한 불만을 하나의 여론으로 조직한 것이 바로 그라쿠스 형제였다. 이들은 몰락한 빈민층에게 공유지를 분배하는 토지법Lex Agraria과 시민들에 대한 정부의 곡물 배급을 추진한 최초의 포퓰리스트였다.

그라쿠스 이전의 호민관들은 임기가 끝나면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었기에 기득권을 거스르기가 사실상 어려웠다. 하지만 그라쿠스 형제는 명문가 출신이었음에도 민중파 연합을 조직하고,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던 호민관의 각종 권한을 강하게 행사하였다. 개혁의 물결이 암묵적 '선'을 넘어서는걸 목도한 기득권층은 엄청난 위협을 느꼈고, 결국 그라쿠스 형제 모두가 원로원의 초법적 조치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초기 민중파의 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라쿠스 형제는 결집된 민중의 불만이 정국을 뒤흔들 엄청난 위력을 갖고 있음을 여실히 증명했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민중파의 깃발을 내걸고 광장정치를 시도하였고, 귀족파와 민중파의 대립이 극한까지 치달으면서 공화정의 혼란은 가중되었다.

내부적 혼란에 외적 요인까지 가세했다. 공화국의 영토가 넓어지면서 접경의 이민족들도 늘어난 것이다. 북방 킴브리족과의 지난한 전쟁, 그리고 시칠리아 노예들의 대규모 반란이 이어졌다. 금권으로 좌우되던 로마 정치계가 속주 누마디아의 왕자 유구르타의 로비활동으로 스캔들에 휘말리다 결국 7년이 넘는 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든 일도 있었다.


고질적인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로마시민은 아니지만 그들과 함께 전쟁에서 피를 흘린 이들, 바로 이탈리아인들이었다. 이들은 동맹시라는 이름으로 다른 속주들에 비해 많은 혜택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정식 로마시민이 아닌 이상 차별을 당할 수밖에 없었고, 주류로 인정받기 위해 여러번 정치적 시도를 하였으나 좌절되었다. 결국 변방 주민들의 응축된 불만은 로마 시와 동맹시 사이의 '동맹시 전쟁'으로 번져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불태우고 말았다.

잦은 전쟁과 예상치 못한 반란들은 원로원의 전통적 의사결정 시스템에 부하를 일으켰다. 기존 엘리트층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급진주의가 대두하였고, 국가재정이 말라가면서 원로원이 특정 유력자들의 사병이나 인기에 의존하는 일들이 늘어났다. 이는 결국 귀족 연합체였던 로마 공화정이 무력을 가진 특정인에게 권력을 양도하게 되는 트리거가 되었다. 바로 독재자의 등장이었다.

마리우스와 술라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군공을 세운 장군들이 자신들의 사병을 이용해 연이어 독재적 권한을 갖고 정적들을 숙청하는 일들이 이어졌다. 평민 출신으로 태어나 유구르타, 킴브리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로마 제3의 건국자'라는 칭호까지 받으며 일곱번의 집정관을 역임한 전쟁영웅 마리우스, 이탈리아 동맹시들과 아시아의 반란을 진압한 후 자신을 탄핵한 로마로 진군하여 공포정치를 펼친 술라가 차례로 정권을 잡고 서로 대립하였다. 혼란기의 최종승자인 술라는 독재관에 취임하여 민중파 정적들을 철저히 숙청하였고, 민회와 호민관, 신진 상공인 세력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원로원의 권한을 강화하는 반동적 개혁을 펼치며 한 시기의 막을 내린다.​


술라의 개혁은 귀족들이 중심이 된 공화정의 질서를 회복하려던 마지막 시도였다. 하지만 개혁의 유통기한은 채 10년도 가지 않았다. 민중파들은 잠시 사라졌으나 민중들의 목소리는 나날이 커져갔다. 퇴역병들에게 분배된 토지는 생계를 위해 부자들에게 다시 팔려나가 대농장은 다시 커져만 갔다. 팽창하는 로마는 신진 상공인 계층의 성장을 끊임없이 부추겼다. 공화정의 균열은 결코 스스로 봉합되지 않았다.

모든 문제는, 로마 공화정이 예전처럼 존속하기에 너무나 커져버렸다는데 있었다. 원로원의 권한을 강화한다고 해서 연일 늘어나는 복잡성과 혼란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라쿠스 연합을 계승한 카이사르 연합이 민중파와 이익집단을 결집하여 기원전 49년 루비콘강을 건너 정권을 잡고, 그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27년 사실상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로마 공화정은 종말을 맞게 된다.


책을 읽으며 문득, 필수 복잡성의 원칙(law of requisite complexity)이라는 용어가 떠올랐다. 체제가 존속하기 위해선 통제자의 역량이 적어도 통제받는 시스템의 복잡성만큼은 커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국가로 대입해볼 때 통치자의 선택지는 세 가지다. 복잡성을 감당할만큼 유연하고 효율적인 정부로 변신하거나, 정보를 통제하고 민간의 성장을 억제하여 변수를 아예 제거하거나, 혹은 혼란을 막지 못한 채 붕괴되거나.

BC 100년대의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이전 시기 로마 공화정은 변수가 많지 않았다. 영토는 제한적이었고, 적들은 순차적으로 등장했다. 빈부격차는 비교적 적었고 사회는 동질적이었다. 소수 원로원 귀족들과 다수 민중들의 조화와 질서 하에 공화정은 잘 돌아갔다. 복잡성이 충분히 체제 내에서 해소되던 시기였다.​


하지만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가 점점 커지면서 복잡성은 필연적으로 커져갔다. 전쟁과 반란은 국경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왔다. 동시에 공화국의 가장 큰 적인 불평등이 심해지고 문화적 다양성과 충돌도 심해졌다. 원로원의 경직된 의사결정과 광장에서 몇백 몇천명이 벌이는 세력다툼만으로 제국 전체의 복잡성을 통제하기란 역부족이었다. 결국 통치체제와 그 시스템의 복잡성 사이의 극심한 불균형은 100년 가까운 자기파괴적인 내전으로 이어졌고, 민중의 인기를 바탕으로 한 초월적 권력자인 황제가 등장하고 나서야 봉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책을 읽는 즐거움은 그런게 아닐까. 스토리를 모두 스포당한 우리 입장에서, 당대의 사람들이 한치 앞에 놓인 운명도 모른채 살 길을 찾아 헤매는 군상을 지켜보는 재미. 그리고 그들이 겪는 희비극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느낄 때 느끼는 섬뜩한 기시감.

오늘날 세계를 번영으로 이끈 기술과 세계화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다시 강해지고 있다. 불평등과 정치적 분열이 선진국 사회들을 좀먹고, 국가간 경쟁구도도 점점 강해지고 있다.


그렇기에, 책장을 덮으면 이내 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공화정과 다양성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걸까? 파괴와 소멸을 거쳐야만 불평등은 해소될 수 있을까? 독재와 폭력이 아닌 이성과 혁신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번영을 이어나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로마 역사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생각할 거리를 선사하는 좋은 역사책이었다. 미국의 패권과 민주주의의 위기, 나아가 우리가 몸담은 공화국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주요 대목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순전히 야망의 힘으로 파괴한 정치 체계는 분명 출발부터 건전하지 않았다. 기원전 40년대와 30년대에 점화된 기름은 대부분 한 세기 전에 이미 들이부어졌다." -머리말

"그들은 전 세계의 주인이라 일컬어지지만, 자기 소유의 흙 한 덩이조차 없습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팔려고 내놓은 도시이니 구매자만 나타나면 빠른 파멸의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유구르타

p57 "대다수 로마 시민들에게 지중해 일대 정복은 번영이 아닌 궁핍을 의미했다. 공화정 초기만 해도 군 복무를 한다고 해서 시민의 재산 유지 능력에 지장이 생기지는 않았다. 전쟁은 항상 집 가까운 곳에서 농한기에 맞춰 치러졌다. 하지만 포에니 전쟁으로 군단이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나가자 징병된 시민들은 고향으로부터 1,500km나 떨어진 곳에서 수년간 끝나지 않는 전투를 치러야 했다.. 재산은 구제불능의 방치 상태에 빠졌다.. 부유한 귀족가문들은 언제든 주워 담기기만을 기다리는 황폐한 땅뙈기를 무수히 발견했다. 이렇게 새로 입수된 작은 부지들이 대규모 토지에 합쳐짐에 따라, 로마의 농경지 풍경은 소규모 자작 농지에서 몇몇 가문이 장악한 대규모 상업 농장 중심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p58 " 땅을 잃은 시민들이 상업용 농지의 노동 인구로 전환될 수 있었다면 그토록 지독한 곤경을 겪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적과의 전쟁이 연이어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노예 수십만명이 이탈리아로 쏟아져 들어왔다. 토지를 모조리 사들인 부유한 귀족들은 늘어나는 토지를 경작할 노예까지 사들였다. 가난한 로마인 가구들이 땅에서 내쫓긴 것과 동시에 자유인 노동력의 수요도 급감했다."

p113 "미래는 낮에 세상을 지배하고 밤이면 그리스 철학을 논하는 고상한 귀족들로 정의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보다는 좀더 강인하고 냉정한 사람들이 미래를 주도할 터였다. 징세청부업자들은 자기네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제국을 몰아갔고, 가난한 농부들은 착취당하다 자신의 땅에서 쫓겨났다. 도시 수공업자들은 몇 번이나 곡물 부족 사태를 마주했고, 이탈리아 동맹시들은 시민권을 얻지 못해 좌절했으며, 수천수만명의 노예들이 거듭하여 반란 직전까지 갔다. 다음 세대는 이들의 힘을 동력으로 삼아 공화국을 지배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로 정의될 터였다."

p148 "세월이 지나면서 그라쿠스라는 이름은 단순히 그라쿠스 형제를 넘어 더욱 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 이름은 로마 정치의 새로운 민중파 운동을 총체적으로 대변한 여러 정책과 전술을 상징했다. 일반적인 민중파 정책에는 도시 빈민층을 위한 곡물 배급, 지방 빈민층을 위한 토지 분배, 기사계급을 이용한 법정 통제, 민회의 비밀 투표, 병역보조금, 부패한 귀족들의 처벌 등이 있었다. 전술적으로 민중파는 원로원의 귀족적인 영향력이 아닌 민회의 민주적인 권력을 활용했다. 민중파 지도자들은 오고 갔지만, 로마 시민들은 늘 변함이 없었고 자기네가 원하는 것을 제시하는 이들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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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70 "사투르니누스와 글라우키아 패거리는 도시 평민, 지방 소농, 기사, 그리고 귀족파 정적들을 괴롭히고 싶어하는 민중파 귀족으로 이루어진 과거의 그라쿠스파 연합체를 부활시키려 했다. 이제 그 연합에는 마리우스의 퇴역병들까지 합류했고, 그들은 조직에 필요했던 완력을 공급할 터였다. 점점 더 규모가 커진 사투르니누스 연합에는 이탈리아 동맹시민들도 포함되었다... 귀족파는 분개한 도시 평민의 자부심을 활용해 자체 폭력단을 결성하고 가능한 모든 곳에서 사투르니누스의 활동을 방해하게 했다. 거리에서 벌어지는 폭력 충돌이 나라의 일상적인 문제가 되었다."

p299 "로마 시민들은 이탈리아 시민권 법안을 부결시켰을 때 자기네가 어떤 길로 접어들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로마인 입장에서 그 일은 오랫동안 수 차례 이어진 이탈리아 시민권 거부 중에 또 한번의 거부일 뿐이었다. 그러니 별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인들에게 그것은 최후의 결정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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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37 "결국 술라의 공화정 복구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문제를 잘못 진단했기 때문이다. 술라의 판단에 따르면 그가 태어난 기원전 138년부터 그가 죽은 기원전 78년까지 로마를 괴롭힌 정치격변은 원로원이 우위를 잃으면서 비롯된 결과였다. 그러나 그가 깨닫지 못한 사실은 그가 자라면서 봐온 원로원의 패권이 근래에 일어난 변화라는 점이다. 실제로 그 패권은 문제의 해법이 아니라 문제의 주요 원인이었다. 술라는 자신이 헌법의 균형을 자연 상태로 재조정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는 시한폭탄의 시계를 되감고 있었을 뿐이었다."

p438 "웅변에 기댄 민중주의자들이 원로원 과두정의 몰락을 재촉했지만, 그들의 목표는 결코 민주정이 아니었고 민주정이 뒤따르지도 않았다. 오히려 30년간 계속된 내전에 지친 로마인들은 곧바로 계몽 군주의 안정적인 품에 넘어갔다... 결국 술라의 헌법은 귀족정 요소의 영구적 승리가 아니라 군주정 요소의 영구적 승리를 낳았다. 로마에 또 다시 왕이 나오지는 않아도 황제는 나올 터였다. 그리고 그 황제들은 아주 오랫동안 로마를 다스리게 된다."​

p445 "모든 적들을 이기고 최종 승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7년에 아우구스투스로 변신했으며, 로마 공화정은 로마 제정으로 변신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통치기간 내내 공화정 정부라는 가면을 유지했다. 원로원 내부에는 옛 공화정이 부활되리라는 희망이 있었지만, 공화정은 결코 되돌아오지 않았다. 기원전 78년에 술라는 자신이 공화정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믿으면서 죽었다. 그러나 일견 새 시대의 여명처럼 보였던 것은 사실상 로마 공화정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기 전 마지막 순간에 비친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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