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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Jul 01. 2022

나는 사형집행인이다.

현직 교도관의 고백.  [어느날, 살인자가 말을 걸어왔다]

  지독하게 운 12월, 교도소의 밤.

눈에 젖은 신발이 걸을때마다 푸슈거리는 소리를 내며 먹물도장을 찍은마냥 족적을 남겼다. 손을 주머니에 꽂아넣고 몰아 내쉬는 숨에 하얀 연기가 퍼지듯 안경에 스며다. 게다가 전력을 30프로만 사용한듯 복도 천장에 조명등이 깜빡거리며 내 시야를 어지럽혔다. LED십자등이 깜빡일때마다 어떻게 들어갔는지 모를 모기와 하루살이들이 눈에 다. 자유를 갈구하는 그것들의 날개짓은 점점 약해졌고 사력이 다했는지 더이상 작은 날개는 움직이지 않았다. 곳, 도소 담장안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모습은 비단 전등속에 갇힌 벌레들에게만 국한되는것은 아니었다. 내가 서있는 긴 복도에 나열되있는 1평남짓의 독방에는 다른 존재들이 자유를 갈구하며 매일같이 돌아오는 교도소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교도관님, 저 오늘 사형받았어요."

두명이상의 부녀자를 살해한 이 사람은 오늘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인간성 회복을 기대할수없고 교화의 가능성도 없을뿐더러 유족에게 용서도 받지 못한 이유였다. 그가 앉아있는 작은방 바닥 한쪽 구석엔 성경책이 놓여져있었다. 의 시선엔 부녀자를 끔찍하게 강간살해한 사람을 어떻게 바리볼까.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가슴에 새빨간 번호를 달고 죽을때까지 살아간다. 그동안 나는 몇몇의 사형수를 만났다. 나 또한 교도관이 되기전까지는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을 머리에 뿔 달린 인간의 탈을 쓴 짐승으로 생각해왔다. 지만 교도소에서 만난 실제 사형수들의 모습은 내 예상과는 전혀달랐다. 애띈 얼굴에 안경쓴 대학생같은 모습의 사형수도 있었고 손자를 따뜻하게 안아줄것만 같은 노인 사형수도 있었다. 그리고 살인자는 뉴스로만 볼것이라 생각했던 그런 내게 어느날, 살인자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엉켜있는 곱슬머리에 주변을 신경쓰지 않는듯한  무심한 걸음걸이, 다소 마른 체형에 평범한 이목구비는 그가 세상에 섞여 살기에 충분한 보호색이 되주었을 것이다.  다큐와 예능프로그램에서 기자와 법 관련 전문가들이 나와 3부작으로 그의 살인사건을 다뤘고 각종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보도내용은 사람들을 공포에 밀어넣기에 충분했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전래없는 충격에 빠졌다. 헐리우드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잔인한 범죄수법에 모두가 경악했다. 그가 검거되고 구속되기까지 검찰청과 경찰서, 법원 할거없이 청사와 대로변에 끔찍한 피해를 입은 피해자의 영혼을 기리는 화환이 줄을 지었다. 그리고 그의 사형을 외치는 피켓시위자의 확성기에서 피 끓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형하라! 사형하라!

대한민국은 1997년 마지막 사형수들이 형장의 이슬로 라졌다. 물론 나도 실제 사형집행을 해본적은 없다. 다만 교도소에는 여전히 60여명의 사형수들이 생활하고 있한민국 법은 아직 사형을 명시하고 있기에 사형의 부활은 전국민적 관심에서 벗어난적이 없다.

형법 제66조(사형) 사형은 교정시설 안에서 교수(絞首)하여 집행한다.

이렇듯 법에는 아직 법정최고형인 사형이 고스란히 명시되어있다. 집행의 장소는 내가 근무하고 있는 교정시설이다. 만약 사형이 집행된다면 교정시설에서 근무하고 있는 나는 사형집행인이 된다. 과거 사형이 시행되던 당시에 선배님들은 출근하고 얼마있어 갑자기 그날 사형자 명단을 건네받았다고 한다. 출근준비를 마치고 현관문을 나서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평범한 그 일상에서 누군가의 얼굴에 헝겊을 씌우고 밧줄을 목에 메다는 일은...더이상 무슨말을 이어해야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장에선 기꺼이 사형집행을 지원하겠다하는 직원들도 있다. 실 교도관은 살인자를 가장 가까이서 마주하는 직업이다. 그말은 즉, 치를 떨 정도의 악행을 저지른 자의 모습과 그들이 쏟아내는 말들을 온전히 온몸으로 받아내아하는 직업이기도 하다.  직업적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울분을 공감하고 같이 분노할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즘엔 히려 가해자인권만큼 피해자인권도 중요하다는 말이 나오기도한다. 뭔가 뒤바뀐 모양이지만 어색하진 않을정도로 현실적이다.


'살인면허' '공무상 살인' 정도로 이해하면 될까. 하지 최근 '사형수가 천수를 누린다.'라는 말이 들려온다. 그리고 그들도 사형이 집행되지 않는다는것을 아주 잘알고 있다. 대한민국은 실질적 사형폐지국이다. 그리고 사형수는 교도소에서 자신의 신체와 생명의 보호를 받는다. 한편에서는 인권보호를 위해 사형대신 가석방없는 무기징역을, 또 교도관들의 사형집행에 트라우마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대로 아무희망없는 교도소에서 죽을때까지 살아야하는것은 인간의 인권에 부합하는지, 또 법의 판단처럼 인간성을 잃은 사형수를 평생동안 교도소에서 보호해야하는 교도관들의 트라우마는 사형집행의 트라우마와 비교했을때 무엇이 더 중한지, 몇몇 교도관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한다.


사람의 목숨을 무참히 앗아간 자의 목숨을 위해 인류는 수십년간 고민하고 토론했다. 인적 바램이 있다면 그 고민의 질량만큼, 아니 그 이상, 피해받은 생명의 고통을 해 더 고민하고 집중했으면 하는 바램은 내 개인의 욕심일까. 쯤에서 한번 조심스레 물어보고 싶은것이 있다.


당신은 사형집행을 찬성합니까, 반대의 입장입니까?


악랄해지고 잔인해지는 범죄앞에 인류는 떤 해답에 도달하게 될까. 의는 무엇일까.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이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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