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화된 무의식을 의식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을까
어제 대학 후배가 남편과 함께 놀러 왔다. 그동안 인스타그램으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멀리서 응원하면서 살다가 정말 오랜만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새벽까지 졸린 줄도 모르고 재잘재잘. 공황장애로 병원치료를 꾸준히 받고 있는 후배에게는 멀리 있지만 내적친밀감을 느꼈다. 각자의 진단명은 달라도 불안으로 점철된 일상을 줄타기하듯 살아가는 공통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그가 진료를 받는데 의사가 '악몽장애'에 대해 언급을 했다고 한다. 의사가 말하길 악몽을 치료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가 꿈에서 깨고 나서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바꿔서 생각하는 훈련이라고. 꿈에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을 재앙화 해서 걱정하는 후배에게도 이 훈련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해 준 말이란다. 고맙게도 그때 나를 떠올려준 그가 이 얘기를 전해주었다.
결말을 의지적으로 바꾸는 연습을 많이 할수록 재앙화된 상상이나 악몽이 일어나는 생각회로가 흐물흐물해진대요.
물론 나는 꿈에서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지만 깨고 나서는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의지와 통제력이 없는 건 아니다. 행위는 무의식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후배의 조언을 들으면서 조금은 희망찬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오늘 새벽 4번에 걸쳐서 악몽을 꾸고 깨기를 반복했다. 마지막 꿈에서 깨었을 때 심계항진이 심해서 호흡이 가빠졌다.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바꿔보자, 생각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행복한 결말을 상상할 수 없는 꿈이어서 포기했다. 발가벗겨졌고, 강간범이 쫓아오는 걸 필사적으로 피해 택시를 탔더니 이번엔 택시기사가 나를 덮치려 하고 그걸 피해 경찰서를 찾아 들어가니 철창 안에 나를 가두고 경찰들이 덮치려고 하고. 갑자기 80년대 민주화 운동 시기로 변하더니 난 프락치가 되어있고, 또 도망치고 숨고. 숨어 들어간 집이 화염에 뒤덮여 연기에 질식할 것 같을 때 깼다. 꿈에서 깼는데 여전히 꿈속에서 맡았던 지독한 연기 냄새가 코에 남아서 정말, 공포스러웠다. 얘를 대체 어떻게 해피엔딩으로 만들지. 내가 상상력이 부족한 걸까. 오늘도 희망과 절망 사이를 줄타기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후배 부부와 점심을 먹고 헤어지는데 앞서 걷는 후배를 보며 순간 뭉클했다. 이 아름다운 여인은 공황발작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삶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발작에 대비하고 두려움이 찾아올 수 있는 순간들로 뚜벅뚜벅 들어간다. 수영을 다시 시작하며 깊은 물속에 들어갈 꿈을 꾸고, 약을 챙겨 비행기를 타고 세계를 여행하고, 시간을 버텨야 하는 회사로 출근한다. 나도 그처럼 나 자신을 포기하지 말아 보려고 그가 준 희망을 곱씹었다.
할 수 있는 만큼 담담하게 오늘을 살았다. 오후 늦게 집에 돌아오느라 체크인 시간까지 청소를 다 끝낼 수 없을 것 같아 걱정됐지만 '못할 게 뭐야. 나 청소 잘하는데' 생각하며 몸을 분주히 움직이는 것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바꿨다. 샤워 중간에 온수가 안 나온다는 손님 전화에 순간 눈앞이 캄캄했는데 일단은 온수기 사용법을 재차 잘 알려드렸다(남편 시킴). '마음 상하셔서 악성리뷰 올리시면 어떡하지'하는 불안이 꿈틀댔지만 (작은 서비스를 포함한) 대화를 통해 살폈던 안색이 나쁘지 않았음을 기억하고 긁어 부스럼처럼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지 말자고 마음을 추슬렀다.
오늘 아침 악몽의 결말을 바꾸는 건 실패했지만 하루동안 크고 작은 염려가 찾아올 때마다 그 결말을 바꾸는 연습을 조금 해보았다. 포기에 머무르지 않은 나 자신 오늘도 수고했어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