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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 Mar 22. 2024

나는 왜 농땡이에 분노하는가

융의 그림자, 힘이 없는 사람은 살기 위해 자신을 미워한다 

MMPI 결과지 1-2-3번이 뾰족하게 올라와있다. 예기불안, 우울, 신체화, 전반적인 불만족감. 그런데 자아강도는 최하점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도 보인다. 자기 방어는 하나도 못하는 상태에서 안테나는 온통 타인을 향해 뻗어있다. 책임감에 버겁다.  


상담사가 말했다.  "슬아 씨는 '나는 나대로 살 거야'가 안 되는 사람이에요. 책임지고 챙겨야 할 일과 사람들은 많은데 정작 자기 자신은 망가져가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자신을 용납하지 못해요. 나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고 완벽을 추구하기 때문에. 신체화 증상이 끊이지 않는 건 이제 나 좀 내버려달라는 신호일지도 몰라요." 


나의 이상향, 아니마는 손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어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보다 내가 원하는 모습(가치, 도덕, 신념 등)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의 자괴감이나 두려움이 크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끌어안고 끙끙댄다. 반면에 나와 달리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내적)분노한다. 현실의 나 자신보다 고귀하고, 강렬한 존재가 되고 싶은 나의 열망이 좌절될 때의 그림자를 투사하는 것 아닐까.


정의롭고 따뜻한 사람이고 싶지만 무리에서 버림받고 싶지 않아서 불의를 못 본 척했던 나. 미움 당하는 누군가를 외면했던 모습. 사랑받지 못할까 봐 ‘거절’을 못해 많은 짐을 끌어안고 살아야 했던 날들. 친구가 없는 외로운 마음을 이성관계로 풀고자 했던 학창 시절의 모습들. 나는 이런 모습들을 스스로 찌질하게 여기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었던 것 같다. 


그런 사람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대학시절 나를 멋진 사람으로 포장하고 싶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욕심에 많은 순간을 내 욕구보다는 다른 사람의 욕구에 맞춰서 행동했다. 남을 돕는 역할을 자처하거나 내가 손해 보고 말거나. 그럴 때에도 씩씩하고 밝은 존재로 보이기 위해 나를 채찍질했다.


쉬엄쉬엄 하라는 말에 왜 이렇게 화가 날까?


동료가 나처럼 열심히 일하지 않고 설렁설렁하는 모습에, 독박육아를 자처하고도 집안일을 완벽하게 해놓지 않는 남편의 모습에, '난 원래 이래. 네가 이해해'라며 자기의 이기적인 무책임함을 가볍게 떠넘기는 주변인에게 가끔씩 미친 듯이 화가 난다. 물론 겉으로는 상냥하게 구는 내 이중적인 모습. 내적 분노에 찬 마음이 외친다 '열심히 살지 않는 건 죄라고!!' 


석심리학자 융에게 그림자란 바로 나의 어두운 면, 즉 무의시적인 측면에 있는 나의 분신이다. 자아의식이 강하게 조명되면 될수록 그림자의 어두움은 짙어지게 마련이다. 선한 나를 주장하면 할수록 악한 것이 그 뒤에서 짙게 도사리게 되며 선한 의지를 뚫고 나올 때 나는 느닷없이 악한 충동의 제물이 됨으로써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게 된다.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 곧 '죄'와 같았던 어린 시절 가정환경 때문일까? 한 분야에 오래 매진하지 못하고 금세 싫증을 내던 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늘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들로 괴로웠다. 자유롭고 싶고,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는데 '한 길'만 죽어라 파며 괄목할 성장을 이루는 이들과 늘 비교당했다. 내 모습, 내 성향, 나 자신 자체를 미워하게 되는 시발점이었을까?


20대의 나를 돌아보면 정 반대의 모습이 되려고 노력했던 나는 결과적으로 한길만 파지 못했고, 내놓을만한 사회적 성취를 이루지도 못했다. 그래도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극단적인 완벽함을 이루려고 애쓰다 보니, 이만큼 애쓰지 않는 동료나 친구들에게 나도 모르게 내적 화가 났다. 


상담을 공부하고, 세상 연약하게 태어난 아이를 키우며 많이 달라졌고 성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요즘도 가끔 사소한 '농땡이'들에 분개하는 꼰대 같은 내 모습을 보면 역시... 사람이 변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구나 생각이 든다. 성숙은 정말 치열한 과정인 것 같다.


경멸 아래 '열등감' 


그림자를 처음 마주할 때는 미숙하고 열등하고 부도덕하다는 등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것들이어서 좀처럼 그것을 내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융은 말했다. "그림자는 본래부터 그렇게 악하고 부정적이고 열등한 것이 아니라 그늘에 가려있어서, 다시 말해서 무의식 속에 버려져 있어 분화될 기회를 잃었을 뿐이며, 그것이 의식되어 햇빛을 보는 순간, 그 내용들은 곧 창조적이며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들이다." 융은 대부분의 그림자는 의식화, 실천을 수반하는 체험적 수용을 통해 창조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예전에 상담 실습 시간에 내 그림자 가면 만들기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작업에 앞서 교수님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그 사람이 특히 어떤 행동을 할 때 미운지를 구체적으로 떠올려보라고 했다. 그런데 그 미운 모습이 바로 내 그림자라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다.


"그림자는 자아의 바로 밑바닥의 어두운 그늘 속에 있는 심리적 경향 또는 내용이므로 그 특징은 상당히 자아의식의 특징과 닮았다고 볼 수 있고 비슷하면서도 전혀 예기치 못한 열등한 경향을 띠게 된다. 그래서 그림자의 투사는 곧잘 자아와 비슷한 대상에 향하는 것이 보통이다."  


내 안의 돌덩이


작고, 느리고, 소심하고, 변덕이 심했던 어린 시절의 나를 비난했던 이들에 대한 분노가 내 마음의 돌덩이가 되었다. 난 결국 나를 미워하는 거다. 그 미움은 내가 아닌 나를 비난하고 상처 주었던 이들에게 돌려도 될 것을. 힘이 없고, 미워도 그들이 필요했던 어리고 나약했던 나는 살기 위해 나를 미워하고 나를 바꿔왔다. 내 안에 돌덩이로 남아있는 '어린 나'는 다른 사람에게서 비난의 여지가 된 내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돌을 던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응어리진 분노는 슬픔이라는 깊은 물에 충분히 잠겨야 녹을 수 있을 것이다. 어린 나를 지금의 내가 충분히 슬퍼해준다면 돌덩이가 좀 녹아내릴까. 언제쯤 내 안의 그림자를 소화할 수 있을까. 우울증과 신체화와 악몽으로 호소하는 깊은 슬픔을 마주하기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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