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잘 살고 싶은가?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 대부분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모른 채 10대를 지나온다.
나도 그랬다. 공교육의 폐단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 그 누구의 탓도 할 생각이 없다. 주입식 교육에도 불구하고 이른 나이에 자신의 꿈을 찾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용기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자기 주관이 뚜렷하지 못한 탓일까. 되돌아보면 10대는 미래에 대한 고민보다는 친구와의 관계, 신체 변화에 따른 고민, 학업성적(?)에 따른 불안감 정도가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정재영 작가의 <왜 아이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에서 청소년 시절에는 뇌가 편도체에 많이 의존하기 때문에 감정적이고, 충동적이며, 본능적으로 행동한다고 한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담당하는 전두엽은 20대 초반이 돼서야 비로소 완성이 된다고 하니 청소년 시기에 자신의 미래에 대한 설계를 알아서 한다라는 것은 뇌과학적으로 봐도 지나친 기대라는 것이다.
나도 일반적인 뇌 발달에 맞춰 지극히 평범한 모습으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중 내 인생의 변곡점이 찾아왔다. 고3 때 담임선생님이 던졌던 질문 때문이었다. "너희들은 어느 대학에 가고 싶니? 그리고 어느 과를 가고 싶어?" 모든 학생들에게 내던지는 공통된 이 질문은 나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너는 무엇을 하면서 살고 싶니? 무엇이 너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니?".... 나는 당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냥 한 번 듣고 잊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이 질문은 1년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왜 나는 답하지 못했을까?" 어쩌면 지금까지는 나는 누군가 하라는 데로, 또 누가 하기 때문에, 그리고 왠지 남들이 하는 것을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조바심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무엇을 하면서 살고 싶냐'라는 나의 질문은 단순히 직업군을 묻는 질문이 아니다. 이 질문은 '어떻게 잘 살고 싶은데? 또, 왜 잘 살고 싶은데?'에 관한 질문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잘 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왜 잘 살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소신 있게 답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당신은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변이 있는가?
이문재 시인의 <파꽃>이라는 시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파가 자라는 이유는 / 오직 속을 비우기 위해서다 / 파가 커갈수록 / 하얀 파꽃 둥글수록 / 파는 제 속을 잘 비워낸 것이다 / 꼿꼿하게 홀로 선 파는 / 속이 없다" 시인은 파가 잘 커갈수록 자기 속을 잘 비운다 말한다. 홀로 꼿꼿하게 서있는 파는 속을 비운 파라고 한다. 그러니 잘 살고 있는 파는 속이 없다. 사람도 이와 같지 않을까? 잘 살고 싶을수록 잘 살고 싶은 욕구에서 벗어나야 잘 살 수 있다는 역설에 답이 있지 않을까. 그렇게 이 짧은 시는 잘 살고 싶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이 질문을 안고 잘 살고 싶었던 나의 삶을 되돌아본다.
그리고 그 찰나에 미쳐 잘 살지 못했던 나를 발견하고, 지금의 내가 잘 살고 있도록 용기를 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