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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아찌 Jan 09. 2021

가마솥에 누룽지


아내가 마트에서 장을 봐 오더니 누룽지를 한 아름 사왔다. 이름도 추억의 가마솥에 누룽지..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어릴 적 어머니가 해준 누룽지는 최고의 간식거리었다. 지금이야 간식거리가 넘쳐나는 요즘 굳이 누룽지를 집에서 해 먹을 리 없고 어쩌다 마트에서 사다 먹곤하지만 어머니가 해준 그 맛엔 비할 바가 못 된다.

없는 살림에 식구들은 많고 쩍쩍 입 벌리는 새끼 새들의 모든 입을 만족시킬 만큼 채워줄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을 만나 인사는 으레 식사는 했는지를 물었다. 식량난을 겪었던 보릿고개 세대들은 그 절실함을 경험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천자문을 외울 때 '하늘천 따지 검을 현 누룰 황'을 가마솥에 누룽지라고 외우곤 했겠는가.

누룽지는 그래서 미처 만족되지 않은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기에 식구들의 누룽지 쟁탈전은 늘 전쟁을 방불케 했다. 특히나 8남매 중 막내에다 약골로 태어난 나는 서열에 밀리고 힘에 밀려 실컷 누룽지를 먹어보지 못했다. 그나마 어머니가 그런 막내를 위해 미리 떼놓은 누룽지가 있었기에 감지덕지하게 맛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끼니를 걱정하며 살던 시절에 먹었던 누룽지는 최고로 맛있었고 그 맛을 내 어찌 잊을수 있겠는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 치고 누룽지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누가 내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그건 ‘누룽지’라고 망설임없이 말할 것이다. 고소하고 맛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최고의 요리라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맛이라는 것이 취향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 테지만 세상의 산해진미는 모두 맛보았을 청나라 황제가 한 말이라면 그 말에 신빙성이 어느 정도는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황제가 누룽지를 먹으며 최고라고 한 데는 이유가 있다. 청나라 전성기의 황제인 건륭제가 신분을 숨기고 지금의 장쑤성 쑤저우 부근을 시찰했다. 준비한 음식은 없고, 식사 때가 지나 인근 농가를 찾아 한 끼 식사를 청했는데 방금 밥을 먹은 주인이 남은 밥이 없다며 난색을 보였다. 그런데 변복을 한 황제가 불쌍해 보였는지 집주인이 누룽지와 채소국을 데워 내왔다.

황제가 뜨거운 누룽지에 국물을 부으니 ‘타다닥’ 소리가 나며 구수한 누룽지 냄새가 퍼졌다. 허기졌던 건륭제가 맛있게 누룽지탕을 먹고는 종이에 “한바탕 천둥소리 울리니 천하제일 요리가 나왔네”라고 써서 집주인에게 답례로 주었다. 중국음식점에서 먹을 수 있는 누룽지탕의 유래고, 누룽지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된 연유다. 아무리 황제라도 ‘시장이 최고의 반찬’이라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어쨌든 이야기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중국에서 누룽지가 요리로 부각된 것은 바로 건륭제 무렵인 청나라 때다.

누룽지는 얼핏 우리나라 사람들만 먹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쌀로 밥을 지어먹는 나라에는 모두 누룽지가 있다. 중국에는 궈봐라는 누룽지가 있고, 일본에는 누룽지 오코게가 있으며, 베트남에도 꼼짜이라는 누룽지가 있다. 아시아 사람의 주식은 쌀이니까 당연히 누룽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실은 유럽에도 누룽지가 있다.

유럽 중에서 쌀 음식이 발달한 스페인 사람들도 누룽지를 간식으로 즐겨 먹는다. 스페인 누룽지는 볶음밥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는 파에야를 만들 때 생기는데 소카라트라고 한다. 5년 전 스페인 바르셀로나 한 식당에서 맛본 소카라트 맛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 스페인식 누룽지인 소카라트가 요즘 미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뉴욕 맨해튼에 있는 한 파에야 전문 식당에서 일부러 파에야가 눋도록 만든 후 소카라트를 먹을 수 있도록 개발했는데 미국인들에게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는 파에야 누룽지를 놓고 “소카라트야말로 누룽지의 향긋함과 바삭바삭한 맛이 어우러진 파에야 최고의 걸작품”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예전에 우리는 누룽지를 주로 숭늉으로 만들어 먹거나 군것질거리로 먹었다. 더 옛날에는 먼 길 떠날 때 먹는 비상식량 정도로 누룽지를 만들었다. 양식이 모자라던 시절에는 누룽지가 주부들에게 골칫거리여서 밥을 지을 때 누룽지가 생기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이런 누룽지가 지금은 세계인의 별미로 발전했다. 그것도 군것질거리가 아닌 값비싼 요리로 식도락가의 입맛을 끈다. 중국의 누룽지탕은 우리를 비롯해 여러 나라에 많이 알려져 있고, 베트남의 꼼짜이 역시 값비싼 누룽지 요리로 발전했다. 여기에 스페인의 소카라트를 비롯해 일본의 오코게까지, 이제는 누룽지마저 글로벌 경쟁을 펼치고 있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우리나라에서도 누룽지 백숙을 비롯해 다양한 누룽지 음식이 나오고 있기는하지만 아직까지 ‘천하제일 요리’라고 하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 한류 열풍에 편승하여 한국 누룽지도 최고의 요리 반열에 올랐으면 좋겠다. 그러나 누룽지를 응용한 요리가 장족의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들 어릴 적 먹었던 구수한 가마솥에 누룽지 맛을 따라가진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배고픔의 간절함과 어머니의 정성, 그리고 북적거림의 따뜻함이 없는 까닭이다.

풍요 속의 빈곤을 겪는 요즘이다. 그동안 일상에서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거 같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그렇고,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영화관에서 편하게 영화를 즐기며,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늦은밤까지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며 인생을 위로했던 모든 것들에 그동안 감사함을 잊고 살았다. 이제 간절함과 감사한 마음이 있어야 누룽지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거처럼 모든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에 간절함과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살아야겠다.

추억의 가마솥의 누룽지를 사 온 아내에 감사하고 어릴 적 옛 추억을 소환해준 누룽지에 감사하며, 사는 재미를 일깨워주는 죽지 않은 내 식욕에 심심한 감사한 마음을 표하는 바이다. 새해 첫날에 먹는 누룽지가 무척이나 고소하고 맛날 거 같다. (2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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